[정지연의 차 이야기] 17. - 삶의 여정(휴작)

한 겨울 우암산 풍경

달빛이 찬연한 새벽. 도심 속의 찬란한 불빛이 한 밤의 적막을 깬다. 이층 창문을 마주 보고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낮과 밤의 구별 없는 소란한 저잣거리. 먼 나라의 일 같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김장, 크리스마스, 송년회의 뒤풀이를 하는 것일까. 아님 한 해를 무탈하게 보냈다고 감사한 마음으로 촛불잔치라도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가올 새해의 소망과 희망을 담은 축배의 잔이라도 드는 것일까. 점점 복잡하고 미묘한 생활의 숲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우암산에 올랐다. 한 해가 벼랑 끝에 와있다는 묘한 아쉬움과 절박감. 복잡한 머릿속을 달래는 데는 산에 오르는 것이 최고이지 싶다. 나목들만 즐비하게 들어선 산등성이에 하얀 햇살이 얇게 내려앉고 앙상한 잔가지들은 헐렁한 옷을 입혀놓은 듯 소슬했다. 쌀쌀한 바람에 낙엽만 여일(旅逸)하다. 속빈 강정 같은 내 마음을 보는 듯하다. 여백의 헛헛한 운치는 겨울산의 멋이기도 하지만 돌고 돈다는 윤회를 떠올리면 새해를 도약하는 기대도 서려있지 싶다.

한때, 신록의 빛으로 꿈과 희망을 불어주고 폭풍 같은 햇빛에도 온 세상을 초록으로 물들였다. 그뿐인가. 만산홍엽으로 물들은 산은 메마른 가슴에 사랑과 정열을 품게 하고 결실로서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던 위대한 산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순환의 이치를 한껏 풀어놓더니 지금은 낙엽만 쌓고 또 쌓는 묵언의 갈무리에 여념이 없다. 자그만 일에도 성내고 울고 웃는 인간의 삶과는 그 격이 다르지 싶다. 그래서 자연은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인가.

나무계단을 내려왔다. 언틀먼틀 쌓여있는 낙엽이 가는 바람에도 어쩔 줄 모르고 바스락댄다. 솟구치는 푸른 피를 담고 온 산을 누볐을 잎들이 쩍쩍 갈라진 노인의 손바닥같이 뻐석한 낙엽들로 남아 처분만 바란다는 듯 고려장 되어 누웠다. 어차피 사라질 몸, 산의 거름이라도 되겠다는 부모의 마음 같은 것일까. 나름은 치밀한 계획안에 헐떡이며 뛰어온 내 삶을 돌아보니 변한 것이라고는 눈가에 입가에 나이테만 선명해졌다. 머릿속에서만 돌던 인생무상하다는 말이 가슴에서 울린다.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마른 잎들이 웅크리며 낮은 포복을 한다. 낙엽 내음이 농익다. 얼핏, 잘 숙성된 차 향기 같다. 작년에 제다하러 갔던 차밭이 떠오른다. 광할한 차 밭에 봄 햇살을 좇아 뾰족이 내민 참새의 부리 같은 잎들. 어린 찻잎의 풋풋한 향기와 비에 젖은 낙엽 냄새가 엉켜서 올라오는 듯하다. 빗물에 녹은 산의 잔해(殘骸)들이 흙 속을 파고든다. 새 생명을 위해 기름진 옥토를 만드는 지구의 윤활유들. 진한 퇴비 냄새에 통통하게 살찐 여린 찻잎들이 하마 기다려진다.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나무가 잎을 떨어트리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틔우기 위함이요 겨울 산이 황량한 것은 비워야 채워진다는 자연의 이치를 나는 산에 오르고야 체감한다. 삶의 늪에서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허우적거린 나의 욕망도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산은 말한다. 우주 안에 발을 들이고 사는 인간도 순리를 벗어날 수 없는 자연의 하나였다.

곧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가득한 산과 들. 숨 쉬는 모든 자연은 지금 칩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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