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원에 팔렸던 삶, 절망속 선택이 인생 바꿨다"

함경남도 출신인 염은복씨가 탈북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김용수

[중부매일 박상준 기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인 최승자의 시 '삼십세'는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함께 '서른'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시구(詩句)다. 이 시의 첫 구절은 그야말로 서른 살의 절망선언이다.

하긴 요즘 젊은이들에게 희망보다 절망이 더 익숙하다. 최악의 실업난에 '삼포세대', '칠포세대'가 의미하는 대로 사회초년생들에겐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서른에 극적인 행복을 느낀 사람도 있다. 그것도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기위해 오랫동안 처절한 고통과 사막에 홀로 선 듯 한 외로움을 견뎌낸 사람이다. 염은복(31)씨.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그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굳히고 목숨을 걸고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작년 11월 나이 서른에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이다. 지금은 충북 진천의 한 공장에서 일하며 방송통신대를 다니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충북사회복지협의회내 탈북민이주지원기관인 '하나센터' 관계자에게 탈북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불편했다. '인신매매'의 실상은 대충 알았지만 이들의 '노예'같은 삶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였다. 탈북여성의 생활실태와 인권문제를 다룬 연구서 '북조선 환양녀(강동환·라종억 저)를 접한 뒤 직접 탈북여성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만난 염씨는 온갖 풍상(風霜)을 겪은 사람답지 않게 표정이 밝았다. 갑자기 눈보라가 치고 한파가 엄습한 지난 11일 목에 '헤드셋'을 목에 걸고 충북하나센터 이정화 전문상담사와 함께 약속장소에 나온 염씨는 또박또박 자신의 지난(至難)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 김용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북한에 살 때에도 겨울에는 이렇게 추웠나.
- "이 정도는 추위도 아니다. 고향 함경남도 리원군에서 살 때는 정신이 번쩍 들만큼 추웠다"

▶지금 고향에는 누가 있나.
- "어부일을 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언니가 있는데 아직도 고향에서 사는지는 모르겠다. 난 막내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됐다. 이젠 고향 생각 하고싶지 않다"

▶가족은 어떻게 하고 혼자 탈북하게 됐나.
- "난 탈북 한 게 아니다. 돈 벌기위해 잠시 고향을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중국을 걸쳐 한국까지 온 것이다. 북한에선 먹기 살기 너무 힘들었다. 당시 60대 아버지가 낡은 나룻배로 웬 종일 물고기를 잡아봤자 그걸 팔아서 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하루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잠시 한 푼이라도 벌려고 일자리를 주겠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아 몇달간 중국을 다녀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먹고살기 힘들었나.
- "혹시 '볏개가루'라고 들어봤나? 방앗간에서 도정할 때 나오는 가루다. 돈이 없어서 알곡을 살 수도 없었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물고기를 잡아서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뿐이었다. 나머지는 거의 볏개가루만 먹어야 했다. 늘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그걸 먹고 협동농장의 동원일꾼으로 일해야 한다. 만약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비표를 받지 못해 '장마당'에서 생선을 팔 수 없고 다른 지역으로 돌아다닐 수도 없다. 이런 환경에서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 김용수

▶당시 20대 초반의 여자가 중국으로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을 한 것 아닌가.
- "돌이켜보면 당시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석 달 정도만 중국쪽 두만강 국경도시에서 돈을 벌어오면 중국 돈 5천 위안을 벌 수 있다는 얘길 들었다. 지금 한국 돈으로 150만원으로 북한에선 큰돈이다. 그래서 9년 전인 2009년 8월 브로커와 함께 기차를 13시간을 타고 두만강까지가서 국경을 경비하는 북한군을 피해 강을 건넜다"

<당시엔 북한주민의 월경이 쉬웠다. 하지만 북한은 2015년 형법을 개정해 '불법 월경죄' 형량을 노동 단련형 1년에서 5년으로 강화했다. 또 탈북민은 모두 남한행을 시도한 것으로 간주하고 '조국 반역죄'를 적용해 최고 사형에 처하고 있다. 최근엔 남북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등으로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면서 중국의 탈북민 단속도 강화됐다>

▶그래서 어디로 갔나.
-"브로커에 이끌려 중국 산둥성의 한 도시로 갔다. 두만강 인근에 있는 중국쪽 도시에는 조선족이 많아서 조선말이 당연히 통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산둥성에 도착하니 조선말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브로커가 가장이 농사꾼인 중국인집에 날 데려다놓고 사라졌다. 알고 보니 날 300만원에 팔아넘긴 것이다. 20대 후반의 그 집 아들은 정신지체장애자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과 결혼시키려고 날 브로커에게 산 것이다. 너무 기가 막혀 브로커를 찾으려고 했지만 연락처를 몰랐다. 꼼짝없이 그 집에서 1년간 노예처럼 살았다"

▶그 남자와 살면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보니 수시로 욕설을 내밷고 아무에게나 돌을 집어던졌다. 중국말을 모르니 제대로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절망스러웠다"

▶그 집에선 어떻게 나오게 됐나.
-"'장마당'에 갔다가 나중에 친해져 내가 이모라고 부르고 있는 60대 탈북여성을 우연히 만났다. 그에게 힘든 처지를 하소연을 하니까 브로커가 사는 집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 왜 나를 정신지체장애자에게 팔아넘겼냐고 따졌다. 브로커는 짐짓 '나는 그런 집인지 몰랐다'고 하면서 이번엔 나를 빼돌려 역시 천진의 농사짓는 집으로 보냈다. 알고 보니 브로커는 나를 팔아넘기면서 두 번씩이나 돈을 챙긴 것이다. 두 번째 남자와 살면서 공장으로 돈을 벌러 다녔다. 그리고 그 남자와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 수입은 2천~3천위안(60~70만원)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평생 이렇게 원치않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외국에 가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때부터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김용수

▶북한을 몰래 월경해 여권이 없어 한국행이 쉽지 않았을 텐데.
- "그 사연을 다 얘기하기 힘들만큼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몇 번이나 사기를 당해 벌은 돈도 많이 날렸다. 미국으로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은행에 송금했다가 돈만 까먹은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탈북민을 대상으로한 보이스피싱에 당한 것이다. 그러다가 아는 언니의 권유로 목숨을 걸고 탈출하기로 맘을 먹었다"

▶어떤 경로로 왔기에 그렇게 힘들었나.
- "여권이 없기 때문에 브로커와 함께 동남아시아 몇 나라를 거쳐야 했다. 내 나이 서른살이 됐던 작년 4월에 결심을 굳히고 브로커를 따라 나섰다. 한 밤에 승합차로 천진을 출발해 청두를 거쳐 운남성 곤명으로 갔다. 그리고 국경지대의 산 밑에 기다렸다가 밤이 이슥해지자 높고 험준한 산을 넘어 라오스로 넘어갔다가 태국으로 탈출해 방곡 한국대사관을 통해 작년 11월 한국으로 왔다"

▶그 과정이 목숨을 걸 정도로 난코스였나.
-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6명이 한조로 곤명에서 2시간 차를 타고 국경의 산 밑에 숨어 있다가 밤이 깊어지면 6시간 산에 오른 뒤 4시간을 내려와야 했다. 칠흙 같은 어둠속에서 그 험난한 정글을 기어오르는데 단 한 번의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실족사하거나 죽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아이와 함께 탈출하다가 생이별하는 사람도 있다" <탈북민들이 태국으로 가려면 중국 국경 도시인 곤명에서 라오스 국경을 넘어 가야 한다. 하지만 국경경비대에 걸리면 바로 중국으로 추방된다고 한다. .

무성한 열대림을 거쳐 무조건 메콩강 방향으로 걷는다. 메콩강엔 강 유역 주민들의 사용하는 배들이 있는데 탈북민들은 대개 이 배를 빌리거나 훔쳐 타고 건넌다. 열대 정글이나 수심이 깊은 강폭을 잘못 선택해 목숨을 잃은 사례도 많다고 한다. 브로커들은 중국의 곤명 국경에서 대략 지명이 적힌 약도를 넘겨 줄 뿐 국경 밖에서의 모든 행동절차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그만큼 성공의 확률은 운에 맡기거나 경험많은 브로커의 인도가 큰 몫을 차지한다>

/ 김용수

▶그 험한 정글을 넘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
- "거의 쉬지도 못하고 정글을 헤쳐나가야 했기 때문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래서 외려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다. 오로지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국경을 넘은 뒤 그제야 안도했겠다.
- "그렇지 않다. 계속 불안감을 느꼈다. 라오스 국경의 산을 넘으면 이번엔 악어가 우굴거리는 메콩강을 조각배를 타고 넘어야 한다. 이 강에서도 빠져죽은 사람이 있다고 들었지만 강을 건너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콕 한국대사관에서 일주일간 절차를 밟은 뒤 항공편으로 한국땅에 도착하면서 '이제 살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왜 진천에 정착하게 됐나.
- "처음엔 경기도 평택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탈북민을 위한 임대아파트 추첨에서 탈락하면서 지도를 보고 정중앙에 있는 진천을 택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는가.
- "진천에서 공장을 다닌지 거의 1년이 됐다. 그 와중에 이정화 선생님(충북하나센터 전문상담사)의 도움으로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해 일하면서 틈틈히 공부하고 있다. 북한의 고등중학교 졸업장을 뗄 수 없어 입학에 난관을 겪었으나 이 선생님이 백방으로 뛰어서 해결해 주었다. 난 대충 중국어 대화도 할 수 있고 글도 읽을 수 있지만 통역을 못해 열심히 배우고 있다"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있고 지금은 생사도 모른다. 많이 외롭겠다. 주말엔 뭐하나.
- "(잠시 망설이던 염씨는 함께 있던 이정화 상담사가 그냥 말해도 된다고 하자 남자친구 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좋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 진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나보다 3살 연하다. 북한을 떠난 뒤 내가 원치 않은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다. 이젠 내가 원하는 가정을 꾸리고 싶다"

▶탈북했다가 한국사회에 적응을 못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탈북민도 있다고 들었다. 정말 한국생활이 좋은가.
- "그런 사람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난 이제 북한과 중국에서의 생활은 잊고 싶다. 더 빨리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김용수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가.
- "대학을 졸업하면 무역회사에 입사해 통역을 하고 싶다. 또 가정을 이뤄 남편과 함께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아직 젊다보니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목에 헤드셋을 끼고 있는데 누구 노래를 좋아하나.
- "가수 에일리 팬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노래인데 김민규가 부른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주제가를 자주 듣는다. 한국에 처음 왔을때 하나원에서 듣던 기억과 '포기는 안해/내겐 꿈이 있잖아/내 전부를 거는 거야/ 모든 순간을 위해'라는 노랫말이 너무 좋다"

염씨는 기구한 인생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은 물론 중국에서 함께 살던 동거남과 심지어 아이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듯 했다. 염씨가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현재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 3만여명중 70% 이상이 여성이다. 탈북에 성공해 하나원에서 새출발을 기다리는 여성도 1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나마 이들은 행운아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리츠워치(HRW)에 자료에 따르면 지난 7~8월중 중국에서 체포된 탈북민은 40여명에 달한다. 북송되면 최소 5년이상 노동단련형을 받거나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염씨에게 한국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것"이라고 말했다. '헬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