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위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함이며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온 몸이 얼얼하다. 바깥출입이 꺼려지고 먹는 것조차 성가시게 느껴지는 매서운 한파로 인해 밥상이 자연스럽게 간소해진다. 이런 날씨엔 고구마를 오븐에 구워 동치미를 곁들이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촉촉한 호박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으면 입안으로 가득 차는 달콤함과 지난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다. 늦은 귀갓길 종이봉투에 담겨 가족 사랑을 확인시켰던 군고구마, 얼었던 손 호호 불며 허기를 달래던 군고구마의 추억, 매캐한 연기 속에 폭신폭신 익어가던 그 사랑과 함께,

그 해, 겨울이 다가오자 따끈한 커피가 위안이 될 정도로 날씨가 찼다. 저녁 퇴근시간이 훨씬 지나서 집에 온 남편이 두툼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쁜 코트 하나 사왔어, 자기 체형과 피부 빛을 말했더니 이걸 골라 주더군!" 옷을 받아 살펴보니 팔목과 재킷부문에 모두 폭스로 배색되어 우아하면서도 제법 비싸보였다. 가격 걱정부터 되었다. "따뜻하고 예쁘면 됐지, 적당한 걸로 골랐어,"사이즈며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교환해 주기로 했다며 안심을 시켰다.

아, 정말 예뻤다. 무게감은 있었지만 가성비가 최고였다.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욕실로 향하는 남편을 보며 재빨리 종이봉투에 도로 넣었다. 다음 날 오후, 종이 백을 들고 매장으로 갔다. 빨개진 얼굴로 종이백을 점장에게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옷 제 맘에 안 들어서 안 입을래요. 남자 옷으로 바꿔 주세요." "남편이 아주 신경 써서 고른 옷인데 마음에 안 드세요?" "매일 추운데 고생하는 애 아빠가 입을 옷으로 바꿔주세요."

내 고집을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점장은 같은 값의 남자 옷을 추천해 주었다.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 " 이렇게 비싼 옷 이었나요?" 자기는 맨날 헌 옷만 입고 출근하면서... 혼잣말을 들은 점장은 안쓰러운 듯 "그러시면 마침 50% 세일하는 옷 들이 있는데 남편 분 것과 아내 분 것 두 벌로 바꿀 수 있겠네요."하며 제안했다. "저는 두꺼운 옷 필요 없어요. 저야 맨날 애기 데리고 다니니까요." "그래도 남편이 알면 서운해 할 거예요." 듣고 보니 분명 서운해 할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그녀가 권해 주는 방한 점퍼를 입어보고 거울 앞에서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벙그러졌다. 남편의 방한복을 담은 종이백을 들고 아이와 함께 점퍼를 입고 나서는 내게 등을 두드려주었다. "좋은 남편 만나서 행복하겠어요, 아기 아빠도 좋은 아내 만났구요, 그렇게 서로 위하면서 살면 복 받을 거예요." 그녀의 말 한마디가 왜 그리 쑥스럽던지 그 매장 앞을 한동안 지나다니지 못했다.

김민정 수필가

이맘때면 옷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그 옷을 다시 꺼내 본다. 지금에 와서 보면 촌스럽긴 하지만 한 달 월급을 투척했던 그 점퍼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삼십 년 전 추억 하나만으로도 온 몸이 따뜻해진다.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쉽게 살 수 있지만 마음만큼은 그때만큼 절실함이 덜하다. 동치미와 고구마, 콩나물과 두부, 설렁탕과 깍두기,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환상의 궁합이다. 바다는 섬을 품고 섬은 바다를 품어 하나의 빛을 이루 듯 부부도 이렇게 서로 품어가며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렇게 둘만의 빛나는 길을 만들어 걸어가는 것이 진정한 짝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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