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 소상공인] 32. 건축가 김수근 마지막 작품 청주 '학천탕'

목욕업계 1세대인 故 박학래 충북도의원의 장남인 박노석 대표와 장녀 박노숙씨가 '학천탕'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 김용수

[중부매일 김미정 기자] 동네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시대 변화에 목욕탕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 2가에 위치한 '학천탕'은 88년 오픈한지 30년만에 '목욕탕 커피숍'으로 변신중이다. 학천탕 박노석(61) 사장은 기존의 목욕탕 시설을 그대로 살리면서 문화를 접목한 이색 '목욕탕 커피숍'을 오는 3월 오픈할 생각에 부풀어있다.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와서 등 밀던 목욕탕, 명절 때마다 와서 때 밀던 목욕탕에서 이제는 욕탕에서 커피를 마시고 한증막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문화의 공간이 될 거에요. 커피를 팔면서 옛 추억을 파는 공간이 될 거에요."

30년 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아름다운 목욕탕'을, 이제는 박 사장이 청주시민에게 '추억'을 선물하겠다는 것이다.

학천탕 외부 모습 / 김용수

학천탕은 7개 층이 목욕탕으로 1~2층 남탕, 3~4층 여탕, 5~7층 남성VIP사우나로 구성돼있다. 이중 1~2층은 커피숍으로 리모델링공사가 한창이고, 여탕과 남성VIP사우나는 최신시설로 업그레이드했다. 이용요금은 6천원에서 5천원으로 낮췄다.

오는 5월에는 지하의 옛 '학천화랑'자리에 100% 자율 식당도 문을 열 계획이다.

"90년대 초반에 지하에 '학천화랑'이 있었는데 이승희 작가(도자공예)에게 임대료 받지 않고 내줬었죠."

학천탕 내부 모습

올해로 꼭 30년이 된 학천탕은 한국의 건축계 거장인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 특히 유명하다. 현대건축 1세대인 김수근 건축가는 국회의사당, 잠실 종합운동장, 불광동 성당, 국립청주박물관, 주한미국대사관 등을 설계했다. 학천탕은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선친이 어머니의 환갑선물로 목욕탕을 선물하기로 하고 전국을 수소문해 김수근 건축가를 찾아갔어요. 김수근 건축가는 지방의 조그마한 목욕탕 건물을 맡을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죠. 그러다 선친의 진심을 알아보고 수락했어요."

하루 스무시간 넘게 목욕탕의 좁은 공간에 갇혀 평생을 고생한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진심이 거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김수근 건축가의 설계도면이 나오고 10개월 뒤 설계모형이 나왔고 그후 1년 6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지금의 학천탕 건물이 완성됐다. 당시 박 사장의 어머니는 환갑선물을 받고 "최고의 선물"이라며 좋아하셨단다.

학천탕 1~2층은 기존의 목욕탕 시설을 그대로 살리면서 문화를 접목한 커피숍으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박노석 대표가 2층 남자목욕탕에서 리모델링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 김용수

"설계모형을 보러 건축사 사무실에 들렀는데 직원들이 다 검은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김수근 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고요."

1986년 6월 14일, 김수근 건축사가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건물의 조형미를 살리기 위해 건축면적을 양보하고,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을 더 챙겼어요. 한마디로 '아름다운 목욕탕'입니다."

박 사장의 선친은 시의원 2번, 도의원 2번을 지낸 故 박학래 충북도의원이다. 목욕업계 1세대로 학천탕을 비롯해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인 '제일목욕탕'(청주시 남문로), 약수탕(청주시 석교동). 학천건강랜드(청주시 봉명동) 등 4곳의 목욕탕을 운영해왔다. 2010년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지금은 장남인 박노석 사장이 학천탕을, 동생 노영씨가 약수탕을 맡고 있다. 제일목욕탕은 현재 경매에 넘어간 상태고, 학천건강랜드는 폐업했다.

"제일목욕탕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인들이 만든 목욕탕이에요.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두고 도망가 청주시에서 운영을 맡다가 저희 아버지(박학래)에게 넘어온 거죠."

학천탕 1~2층은 기존의 목욕탕 시설을 그대로 살리면서 문화를 접목한 커피숍으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박노석 대표가 2층 남자목욕탕에서 리모델링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 김용수

목욕탕일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둘,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낙선해 실의에 빠져있을 때 아버지일을 도와드린 게 계기가 됐다.

30년 역사에 단골도 많다. 이원종 전 충북도지사는 지사 시절 매일 새벽마다 들러 목욕을 한 뒤 도청으로 출근했단다. 故 김준철 대성학원 설립자, 정종택 전 충청대 학장, 박영수 전 청주문화원장도 학천탕의 단골이용객이다.

"88년 오픈 당시에는 서울 이남에서 목욕탕 단독건물로는 가장 컸었죠."

한때 잘나가던 목욕탕이었지만, 실패도 맛보았다. 폐열로 물을 데워 목욕탕에 공급하려고 2007년 폐기물 소각장을 운영했으나 1년도 가지 못했다. 폐열로 고추건조장, 꽃소금공장도 운영했지만 경영이 악화되면서 줄줄이 경매에 넘어갔다. 학천탕도 경매에 넘어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3년만인 지난해 되찾았다.

목욕업계 1세대인 故 박학래 충북도의원의 장남인 박노석 대표와 장녀 박노숙씨가 '학천탕'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 김용수

큰누나인 박노숙(70·여)씨는 7~8년 전부터 학천탕 관리를 맡고 있다.

"목욕문화가 달라져서 예전에는 때를 밀기 위해 목욕탕에 왔는데 요즘은 쉬기 위해서, 피부건강을 위해서 오세요. 학천탕에 오시는 분들이 행복하게 목욕을 하고 가시길 매일 기도해요."(박노숙)

그녀는 매일 첫 손님과 마지막 손님의 목욕요금을 모아 틈틈이 기부를 하고 있다. 한달이면 36만원. 벌써 2년이 됐다.

"선친께서 늘 직업봉사를 말씀하셨어요. 매일 목욕요금을 모아 몸이 아프신 어르신들을 위해 기부를 하고 있어요."(박노숙)

일회용 면도기와 일회용 칫솔, 때밀이 장갑, 샴푸·린스 세트 등 세면도구 판매함은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은 정겨운 목욕탕 풍경이다. / 김용수

이들이 생각하는 '목욕'이란 건강이자 쉼이고, 행복이다.

"목욕보다 더 좋은 보약이 어딨겠어요. 새해 몸을 깨끗이하면서 건강도 찾고 여유도 찾으세요."(박노숙)

"목욕은 '스마일'입니다. 목욕하고 나면 '아, 기분좋다~'라는 말이 절로 입에서 나오잖아요."(박노석)

새해 세신(洗身)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몸을 깨끗이 닦으면서 삶의 고단함과 고민도 씻어내 세심(洗心)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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