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18. 한가로움을 타는 향기

새벽 녘, 멈춘 시간 사이로 여명이 어둠을 타고 오른다. 미끄러지듯 하늘로 오르는 홍시 빛 일출. 우주의 신묘한 비밀을 훔쳐보는 것 같은 야릇한 설렘. 산도 나무도 바람도 사람도 찰나의 신비함을 놓칠세라 숨소리도 아낀다. 옅은 햇살이 아른거리는 산성의 숲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맑은 날씨에 선명한 일출은 장관이었다. 고향인 동해에서 보고 자랐던 일출과 그 웅장함은 다르지만 형용하기 힘든 신비로움은 볼 때마다 가슴을 뛰게 한다. 팬티 바람으로 뛰어다니던 어릴 때의 일출은 이글거리는 태양이 나를 삼킬 것 같은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새해의 희망을 두 손 모아 빌어본다.

만년 명상이라는 산의 고즈넉함 때문일까. 거뭇거뭇한 산 저편에 신선들의 여운이 들리는 듯 적막하고 이따금씩 지저귀는 새소리만 한가롭다. 나뭇가지를 타고 유유히 떠오르는 태양이 붉은 달빛같이 한유(閑裕)하다. 아~ 편안하다. 무아의 행복은 이런 것일까. 태양은 찰나라는 속도로 지구를 밝히는데 나는 그 찰나에 머물며 아늑한 여행을 하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몇 번의 해돋이를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느껴본 한가로움이다. 욕망과 욕구가 가득한 산 아래의 삶은 남의 일 같다. 이렇게 평온한 행복이 내게 몇 번이나 있었을까. 픽, 웃음이 나온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삶의 애고를 매번 차로 다스리며 살았으면서 먼 곳 만 바라본 나의 이기적인 생각. 잠시 망각한 나의 부실을 꾸짖는다.

일 년 내 하루도 빠짐없이 차를 마셔왔다. 기뻐서 마시고 우울해서 마시고 갈증 나서 마시고 외로워서 마셨다. 그중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감의 도구로 차를 마실 때가 가장 뿌듯했던 것 같다. 향기로운 한 모금이 세속에 찌든 먼지를 털어주는 그 시간은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한가로운 삶을 제공했다. 어찌 보면 행운아 일수도 있겠다. 빠르게 돌아가야만 하는 21세기에 뒤처질 일없는 느림의 미학을 본보기로 살고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 삶인가.

여유로움이 중요한 만큼 예부터 차 자리는 아취(雅趣)를 중요시 여겨 사람 수가 적을수록 귀하게 여겼다. 초의 선사는 다신전(茶神傳)에 혼자마시는 차를 신(神)의 경지, 두 사람이 마시면 승(勝)의 경지, 세 네 명이 마시면 멋스러운 취(趣), 다섯 여섯 명이 마시면 평범한 범(泛), 일곱 여덟 명이 마시면 그저 나누고 베푸는 시(施)라고 했다. 요즘은 차 자리 주제에 따라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티파티도 있다. 하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차를 마시는 자리는 적당한 것 같다. 사람이 많으면 말이 많아지고 차의 본연을 잃기 때문이다.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누구는 차는 한가해야만 마시는 음료라지만 차를 마시는 도구적 행위 자체가 평온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순례의 길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계시로 한가함을 체험했다 한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모든 욕망을 단절하여 '한가'를 강조하고 그것은 진정한 자유를 얻는 일이며 진실로 '한가'는 우리들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했단다. '한가'는 오염된 내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주는 산소 같은 것이리라.

올해는 차 한 잔 우려 놓고 멍 때리는 시간을 좀 더 보내야겠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일에 향기로움까지 더한 진한 삼매경에 빠진다면 더 바랄 것이 뭐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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