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호수와 마을이 만나 고요하되 억겁의 신비를 품은 비경

옥천 부소담악 풍경

산하는 잠들지 않는다. 산하는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반복된다. 꽃이 피고 지더니 여름날 열매로 가득하고 가을에서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다시 겨울이 오면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북풍한설을 견뎌야 한다.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는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서로 다투지 않으며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르는 물은 언제나 맑다. 수적석천(水滴石穿)이라고 했던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물은 고요하되 큰 바다를 만든다.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를 유장하게 흘러가는 금강에 곧추서 있는 부소담악(赴召潭岳). 나랏님의 부름을 받은 산이란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 또한 산을 넘지 못하니 나랏님의 부름을 받았어도 어찌 갈 수 있겠는가. 도성으로 향하던 중 이곳 추소리의 물줄기에 발목이 잡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최후를 맞은 곳이 부소담악에서 2㎞ 떨어진 군서면 월전리다. 추소리와 뒤편 고산리에 백제군 진영이 있었다는 것이 기록에 전해지고 있으니 짐작컨대 후대 사람들이 부소담악의 아름다움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 아닐까. 어찌됐든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절경 중 하나다. 주변의 추소 8경이 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났고, 조선시대 문장가들도 이곳에서 글을 읽으며 시를 쓸 정도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나 자연이나 아름다움은 고단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으니 말이다.

부소담악은 산이었지만 1980년대 대청댐 개발과 함께 산 일부가 물에 잠겼다. 주변의 안양사와 문필봉 등 빼어난 경관 대부분이 가뭇없이 사라졌고, 부소담악은 아랫도리만 잠긴 채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흙과 나무들은 물살에 빠져 나갔고 암벽만 억겁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물 위에 뜬 바위절벽처럼 보인다. 그 길이가 700m에 이르니 비단강을 품은 것이 병풍처럼 아름답다.

추소정

인근의 추소정에서 부소담악의 풍경을 바라보라. 날카롭게 솟아오른 칼바위와 길게 펼쳐진 벼랑은 나그네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그 풍경을 제대로 보려면 양지복호라는 이름의 마을 뒷산을 올라가야 한다. '볕이 든 땅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라는 뜻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부소담악과 대청호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주변에는 한말 개혁파 정치인이었던 김옥균과 기녀 명월이 사랑을 노래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는 청풍정이 있고 숲길 따라, 물길 따라, 들길 따라 시골의 정겨운 풍경을 훔치려는 나그네의 모습도 한유롭다. 그래서 여행은 길 위의 도파민이다. 자연 앞에서는 모든 감각세포가 절로 일어서고 모든 자극이 절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그네의 오감을 흥분시키고 즐거움으로 가득하며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케 한다.

주변에 생태농원이 많고 팬션단지가 하나 둘 들어서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청호 500리길의 한 코스가 되면서 더욱 인기다. 자연을 통해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하고 저 푸른 호수처럼 내 마음도 맑게 빛나면 좋겠다. 소나무 숲과 기암절벽을 따라 상념에 젖는다. 찬바람이 심술궂다. 잠자고 있던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의 시간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아있다. 물에 잠긴 것은 마을길과 숲길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도 흐르는 물살에 띠배 하나 만들어 띄어 보냈다. 어떤 사람은 떠나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물 속 깊은 곳에 부려 놓았다. 언젠가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희망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그날의 아픔과 그날의 설렘은 오늘도 유효하다.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탄생되면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하나되는 위대한 성찬을 즐기리라.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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