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위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함이며 해당 칼럼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눈이 가득 쌓였다. 30년만의 발걸음이 하얀 찔레꽃으로 물들었다. "얘야, 왜 이제 오느냐. 어서 들어가 밥 먹자"라며 내 어깨를 보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당 한 가운데서 쇠죽을 끓이며 장작 패는 아버지도 얼핏 스쳤다. 가마솥의 밥 짓는 냄새와 뒤꼍 장독대의 장 익는 냄새가 구순했다.

이상했다. 내가 밟고 있는 곳은 분명 이승인데 저승의 아버지가 마중 나오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까지 나를 반겼다. 그 날의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완강한데 이승과 저편의 풍경들이 서로 뒤섞였다. 언제 어디인지 식별할 수 없는 기억들이 포개졌다. 나는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다급한 갈증처럼 마당과 뒤꼍과 방안의 구석구석을 뒤적거렸다. 찬바람이 나부꼈다.

30년 만에 찾은 내 고향 초정리는 시리고 아팠다. 골목길의 추억은 허허롭고 뒷동산 참나무 숲은 가볍고 사소했다. 탕마당의 팽나무도 세월을 견디지 못해 고사 직전이고 이곳을 오가며 뛰어놀던 악동들은 지천명을 훌쩍 넘겼으니 생사가 불분명했다. 골목길의 돌담과 실개천과 삽살개도 오간데 없다.

이곳에 상탕, 원탕, 하탕이라고 부르던 세 개의 약수터가 있었다. 상탕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초청영천'인데 세종대왕이 이곳에 머무르며 요양을 했던 곳이다. 원탕은 두레박으로 약수를 길어 마시는 곳이었는데 바로 옆에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하탕은 노천탕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약수가 하늘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톡 쏘고 알싸한 맛의 약수를 즐겨 마셨다. 전국 각지에서 물맛 보겠다며 달려온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기차를 타고 초정약수 탐방을 하는 관광상품이 운영될 정도였다. 그리고 백중날이 되면 청주에서 가장 큰 놀이가 펼쳐졌는데 풍물놀이와 씨름대회가 하이라이트였다. 족욕과 등목으로 무더위를 식히고 야바위꾼과 기생집, 방물장수 등과 함께 해지는 줄 몰랐다.

학창시절 소풍은 으레 초정으로 왔다. 약수를 마시고 탕마당에서 장기자랑을, 뒷산에서는 보물찾기를 했다. 그날 맛보던 도시락과 달고나와 아이스깨끼의 추억은 지어져버린 먼 기억이 내 몸과 마음을 옥죄었다. 옴짝달싹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전설 속에서 머뭇거려야 했다.

승악골에서는 천렵을 하며 풍즐거풍(風櫛擧風)을 즐겼고 구녀산에서는 다람쥐처럼 성곽을 오르내리며 머루와 달래를 따 먹었다. 탕마당은 거대한 놀이터였고 문화광장이었다. 세상의 문물이 모였다고 흩어지는 교역의 장소였다. 바로 이곳에 세종대왕 행궁 터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초정리에서 121일간 머무르며 한글창제를 완성했고 인근 마을의 노인들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었다. 청주향교에 책을 하사하고 박연을 불러 편경을 만들도록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로 조세법을 개정하고 이곳에서 시범도입하기도 했다. 외교, 과학, 문학 등 조선의 르네상스를 실천한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희미해졌다. 추억은 소소하고 그리움은 쓸쓸하다. 애틋함도 메말라 버렸다. 이것들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도 없었다. 공장의 기계소리와 식당의 번쩍이는 간판과 호텔의 레온사인은 이곳이 더 이상 고향의 땅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장임을 웅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남루했다.

나는 몇 해 전에 초정을 창조의 아이콘, 문화의 성지로 가꾸기 위한 노력에 동참했다. 세종대왕 초정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수립했고 세종대왕 100리길이라는 프로젝트도 기획했다. <생명의 숲 초정리에서>라는 책을 펴냈으며 초정의 잊혀져가고 사라지는 것들을 재생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다시 고향집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텅 빈 집은 잡초로 무성했고 지붕엔 검버섯이 솟았다. 그 많던 대추나무도 벼락 맞아 속절없다. 늙은 밤나무만 햇살과 바람과 구름을 벗하며 빈 집을 지키고 있었다. 시간과 기억들은 앞뒤가 뒤섞여서 정신이 혼미했다. 다시 신발끈을 동여맸다. 본질을 향해 내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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