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2017년 2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 YMCA강당에서 열린 2.8 독립선언 선포 제98주년 기념식에서 승병일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2017.02.08 / 뉴시스 제공

"전조선청년독립단은 아(我) 2천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2월 8일에 발표되었다 하여 '2.8독립선언서', 동경 유학생들이 발표한 것이라 하여 '동경유학생독립선언서' 등으로도 불리는'선언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제가 '사기'와 '폭력'으로 국권을 빼앗아 무단정치를 강행하여 국가생활에 필요한 지능과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무제한적으로 일본인을 이주시켜 조선인을 해외에 떠돌게 했다고 비난하며. 일본이 독립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宣)"할 것이라고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춘원 이광수가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선언서가 발표되던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 유학생 3백여 명이 모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이광수는 없었다. 선언에 참여한 대표들이 모두 체포되어 선언이 아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 미리 상해로 탈출한 것이다. 걱정한 대로 나머지 대표 10명은 모두 체포되었으나 선언서는 남아 나라 안팎에 전해질 수 있었다. 2.8독립선언서는 이후 민족 지도자들에게 큰 자극을 주어 만세 운동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고, 다른 피압박 민족의 저항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해 시절의 이광수는 일제에 맞서 가장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여운형 등이 결성한 '신한청년단'에 가담해 속속들이 들이닫는 고국의 만세운동 소식을 정리하고 이를 영문으로 옮겨 해외에 타전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어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것도 그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후일 그는 당시의 상황을 "참으로 딴 세상 같았다"고 회고했다. 독립이 곧 실현될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세의 열기는 빠르게 식어가고 식민주의의 광기는 날로 도를 더해갔다. 봉건시대의 종언을 알리고 새 시대의 문을 열어 보인 명 논설과 소설 등을 통해 이광수는 그때 이미 조선 제일의 문사요 민족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터. 일제의 입장에서 그는 당시 누구보다도 위험천만한 요시찰 갑호 대상자였으며, 역설적으로 가장 '가성비'높은 협력자일 수 있었다.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동포의 피를 빨던 일본의 박춘금(朴春琴)이나 관동군 앞잡이인 만주의 김동한(金東漢) 같은 '쓸모 있는 얼간이'들에 비할 바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가 그런 이광수를 내버려둘 리 있을까. 1921년 3월 상해에서 귀국한 뒤의 삶은 사신(死神)과의 동거나 다름이 없었다. 제 의지대로는 말 한 마디 할 수 없고 제 생각대로는 글 한 줄을 쓸 수 없는 목숨을 산 목숨이라 할 수는 없다. 1937년 6월, 182명이나 엮인 '수양동우회'사건이 불거진 뒤에는 죽음을 경각에 둔 상황이었다. 밀면 쓰러질 지경의 병객인 이광수는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침묵'에 나오는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고문당하는 동지의 절규를 지척에서 견뎌야 했다. 형의 부탁을 받은 김동인이 이광수를 찾아와 넌지시 자진(自盡)을 내비쳤다. 이광수는 자진 대신 '합의'를 택했다. 일종의 전향 각서였다. 앞장서 성과 이름을 바꾸고 몸에서 일본인의 피가 나오도록 변할 것을 외치며, 일본에 건너가 학병 권유 연설을 하기도 했다.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후대는 그를 '친일파'라 규정했다. 어린 학생들까지도 이광수라면 이 땅 신문학 운동의 선구자라거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라는 사실보다 '친일파'라는 사실을 먼저 떠올린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행적에는 눈길 하나 주는 사람이 없으며 정부는 그 흔한 서훈 하나 주지 않았다. 공(功)보다 과(過)에 민감하며, 추어올리기보다 깎아내리기에 능한 아름답지 못한 심성 때문이라 생각하니 우울하다. 지난해 한국문인협회가 '무정'발표 백 주년을 맞아 '이광수문학상'을 만들려다 유야무야되고, 미국의 유족들이 생전에 살던 사릉의 옛집에 기념관을 세우고자 하나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이다. 모두 친일파라는 '주홍글씨'때문이란다. 문인들마다 문학관 짓고 문학상 만드는 게 유행처럼 번진 세태 속에도 그의 이름을 단 문학상 만들고 살던 집에 기념관 하나 세우는 일조차 거부당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부끄러움일 뿐이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두려워 손들고, 죽을 수 없어 굴신한 것을 두고 '친일'이랄 수는 없다. 그건 오직 칼 들고 복면 쓴 강도 앞에 내놓은 가락지 같은 것. '항일'에 따른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손으로 '친일'의 매를 휘두르는 폭력은 온당치 않다. 우리에게 이광수가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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