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책 통해 깨달은 이치… 나라 구하려 한 조헌 그리다

옥천 후율당

울컥했다. 화려한 햇살 뒤에 숨어있던 칼바람이 심장을 후비며 들어왔다. 북풍한설 속에서도 숲과 바위와 시냇물은 엄연했다. 제 생명 다 한 억새들조차 꼿꼿하게 선 채 단호히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오직 사람의 마음만 헐렁할 뿐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메마른 나무껍질을 비집고 새 순이 움트기 시작했다. 모든 것 부려놓은 채 침묵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을 위해 어둡고 싸늘한 대지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혼미했던 마음에 찬 물을 끼얹었다. 자연은 곤두박질치고 있는 삶에 용기를 주었다. 다시 일어설 것을 웅변했다.

조헌은 늘 책을 곁에 끼고 살았다.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먹는 것, 입는 것 하나 제대로 챙길 수 없었지만 책 읽는 것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옷과 신발이 다 해어져도 비바람 무릅쓰고 글방 가는 것을 쉬지 않았다. 논밭에서 일할 때도 항상 책을 옆에 끼고 다녔다. 시대는 수상하고 살기는 팍팍했다. 이 땅에 희망이 있을까 싶었다. 선인들은 그 때마다 지식으로 무장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성균관에서 공부를 했다. 책을 읽으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24살이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율곡 이이가 큰 스승이 되었다. 여러 학자들과 함께 반듯한 삶, 평화의 나라를 만드는 길을 모색했다. 지혜롭게 생각하고 용기있는 행동만이 대안이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국가정책에 서슴지 않고 직언했다. 그럴 때마다 모함과 비난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머뭇거릴 수 없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 있기 때문이다. 궁궐에서는 일본과 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교묘한 술책을 알고 있었기에 목숨걸고 반대했다.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저들은 지금 조선을 침탈하려 합니다.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기 전에는 그 어떤 친교도 아니되옵니다." 왕은 진노했다. 조정의 일마다 날을 세운다며 몹쓸 놈이라는 격앙된 표현까지 사용했다.

조헌은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으로 왔다. 밤티마을에 후율당(後栗精舍)을 지었다. 책을 읽으며 후학을 양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 교통 편리하고 풍미 깊은 곳을 찾았다. 이백리라는 마을이 좋았다. 숲과 바위와 계곡물이 맑고 향기롭게 끼쳐왔고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곳이다. 높은 산과 넓은 들과 길게 뻗은 물길이 한 눈에 보이도록 2층으로 지었다. 팔작지붕이다. 깊은 산은 사람의 심성을 깊게 하고, 넓은 들은 사람의 심성을 넓게 하며, 맑게 흐르는 강물은 사람의 심성을 맑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풍경 좋은 곳을 명당으로 삼는 것이다. 살아서 도인(道人)이 되기를 바라고 죽어서는 신선(神仙)이 되길 갈망하지 않았던가.

옥천 이지당

이 고을의 영재들이 제 다 모였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학문을 연마하는 서당이었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국(救國)을 결의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나라걱정이 태산이었다. 때마침 왜놈들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서신이다. 큰일이다. 백의(白衣)를 입고 조정으로 갔다. "선비는 자신의 말이 쓰이지 못할 바에는 말하지 않는 것이 지당하지만 삼강오륜의 윤리가 땅에 떨어질 지경이면 분연히 일어서야 합니다. 이 신이 못났더라도 말만은 버리지 마시고 왜적에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일간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했지만 소용없었다.

통곡하며 옥천으로 내려왔다. 아들 완도를 시켜 평안 감사 권징과 연안 부사 신각에게 글을 보냈다. "참호를 깊이 파고 성을 수리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라." 그들 역시 비웃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들이 내륙으로 돌진하더니 청주성까지 올라왔다. 의병을 모집했다. 영규대사와 박춘무 장군도 함께했다.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는 열망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왜군들은 그 무서운 기개에 놀라 오줌을 지리며 달아났다.

청주성 탈환의 기쁨도 잠시였다. 다시 금산으로 달려갔다. 이쪽은 700여 명, 왜군은 수천 명의 병력과 신식무기를 갖고 있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라. 빼앗긴 들을 되찾아야 한다."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의병들이 피를 토하며 죽었다. 아들 완기가 전투 내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적들의 집요한 공격에 조헌도 끝내 숨을 거두었다. 눈물을 흘릴 시간도 없었다. 아들은 조헌의 옷을 입고 적진으로 향했다. 왜군이 격렬하게 공격했다. 아들은 시신을 거둘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졌다. 처참하게 죽어야 했다. 700여 명의 의병들도 함께 운명을 달리했다. 700의총이다.

훗날 우암 송시열이 각신서당을 찾았다. 풍광을 보며 조헌의 충절을 생각했다.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현판을 '이지당(二止堂)'으로 바꿔 달았다. 글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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