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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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는 내내 미안했다. 순백의 풍경에 내 발자국이 행여 흠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 뒤를 따라올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발자국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두려웠다. 헛된 길이 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그랬다. 첫 경험, 첫 만남, 첫 걸음에는 항상 설렘도 있었지만 두려움과 미안함이 함께했다. 그 때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되돌아봤다. 늘 아쉽고 헐렁하다. 나로 말미암아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기도 했겠지만 상처를 받았을 사람도 적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언제나 현명해질 수 있을지, 그래서 더욱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많다. 공적인 일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지역과 국가와 세계를 위한 일 앞에서는 망설일 수 없다.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어야 하고, 그 누구도 가지 않은 새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독립투사도 아닌데 사회적 책무라는 무거운 짐이 머뭇거리는 내게 채찍을 가했다. 그 성장통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판에 기웃거린다. SNS나 언론은 실시간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중계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난립하고 편가르기는 하늘을 찌른다. 그 칼날에 상처입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지역과 국가 모두가 소모적이고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이 된다. 정치는 어둡고 불평등하며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을 밝고 깨끗하게 하는 일인데 현실은 정 반대를 향해 치닫는다. 개인의 출세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얼룩진 자들의 잔치가 돼 버렸다. 정당과 정치적인 광풍에 편승해서 승자가 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자만과 독선으로 가득할 것이다. 소신과 열정은 찾을 수 없고 무책임과 거짓이 난무할 것이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착각은 지도자를 거들먹거리게 할 것이다. 백성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만 갈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사람이 정치에 편승해 승리한들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사랑과 공감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머리를 맞댈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읽고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동네 구석구석의 사정을 이해하고 미래의 자산으로,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전략과 비전을 품고 있어야 한다. 똘레랑스(관용)와 노마디즘(세계인식) 말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창의적인 사고와 열정의 소유자가 필요하다. 국가도 위기지만 지역의 경우는 더욱 치열하다. 오죽하면 지방소멸이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현실에 안주하거나 잘못된 길을 갈 경우는 영원한 낙오자가 될 수 있다. 고루한 관습과 판단을 경계한다. 시대정신에 맞는 지혜와 전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역의 우성인자(DNA)가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풍요롭게 가꿀 것인지 고심참담(苦心慘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필요하다. 열정을 다해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용기와 성찰도 중요하다. 누구나 새로운 도전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꿈을 일구기 위한 노정은 결코 간단치 않다. 가장 아름다운 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경직되고 머뭇거리는 내 안의 나를 깨우는 일부터 해야 한다. 새끼 거북이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카벙클'이라는 임시 치아로 두터운 알의 벽을 쪼아야 한다. 온통 부서지고 입에서 피가 나도록 벽을 깨야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다. 그런 용기와 끝없는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변광섭 에세이스트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것이다. 맹자의 말이다. 권력을 좇는 불나방이 되지말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삶의 철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을 나누고 부끄러워할 줄 알며 겸손과 배려를 실천하고 반듯한 삶,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지도자를 곁에 두고 싶다. 나와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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