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씨 제공

모두가 잠든 밤에 눈꽃이 물 흐르듯 피어났다. 감탄을 하며 갈대같이 나부끼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까지 구절초 쑥부쟁이에 반해서 '가을이 아름다운 건'이란 시를 암송하며 지냈는데, 눈앞의 백설에 마음이 기우는 것이 느껴져서다.

그뿐인가. 프리지어에 홀려서 예찬을 하더니, 한 겨울에 철모르고 피어난 덴마크 무궁화와 영산홍에 반해서 들여다보고 일과를 시작하니 말이다. 햇볕이 잘 드는 실내정원이라 생태조건이 맞아서라고 겸손한 표정까지 지으니 더 예쁘다. 아름다움도 권력인데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하면서 지금도 합리화를 하는 중이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고 나면 시들하니 몹쓸 건 이내 심사~"라고 어머니가 부르시던 옛 노래가 떠오르는 것은, 마음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체감의 그 나이가 되어 서리라.

흐르는 것이 어찌 물뿐이랴. 삼라만상이 다 흐르는 것을. 물 같은 액체만 흐르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도 물동이에 물이 출렁이듯 쏟아지기도 하고 흐르면서 이렇게 변덕쟁이를 만들어 버린다.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 직접 경작을 했다며 쌀을 보내왔다. 결실의 수고에 사람의 향기까지 더하여 보낸 것이다. 처음에는 퇴직한 사람 불쌍해서 보냈나 하고 농담을 했지만, 주는 정을 고마운 마음으로 전해 받았다. 안 보면 정도 멀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최선을 다하여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 나누어줄 어떤 결과물을 내놓지도 못하고 누군가의 심금을 울리는 흡족한 글을 쓴 적이 있던가. 글은 마음을 그린 것이고 그것을 묶은 것이 책이니 책은 마음의 창고에 저장이 되는데도.

세월을 보내며 그때는 왜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 후회가 조금씩 쌓이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지인의 진솔한 수필을 읽으며 연속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해온다. 늘 진솔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니 '진심으로'라는 어휘를 굳이 사용해야 하냐며 그런 표현을 삼가 왔다.

그랬는데 내 마음을 진솔하게 보여주었는지에 생각이 머문다. 보일 듯 말 듯한 사람의 모습이 더 매력적이라고 하지만, 글이란 치부(恥部)도 거침없이 드러내 놓을 때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공직에 있는 사람은 비밀 준수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고, 긍정적이고 방어기제가 강한 사람이라 좋지 않은 것은 다 잊어버렸다고 하는 핑계가 습관이 되었지 싶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단호했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큼 나이가 들면 마음도 흐르지 않고 강 하구에 쌓인 결 고운 은모래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에 보조를 맞추려는 것인지 마음도 멈추지 않고 흐르며 수수께끼 같다는 것을 터득해간다. 다만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다가 장애물을 만날 때만 돌아가는데 마음은 흐르는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마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불현듯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소리를 내며 흘러서 사금파리를 양산하기도 한다. 원을 그리며 숨바꼭질을 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도 한다. 하여 어제의 내가 아니니 나잇값이나 어른스러움이라는 단어 앞에서 가끔은 무색해진다.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구절을 사용하곤 한다. 걱정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비우라 하고 그 비운 마음을 무심(無心), 또는 공(空)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마음의 알맹이를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하여 법당에 심우도를 그려 놓지 않았던가.

이영희 수필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마음이 움직여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마음이나 시간이나 흐르는 것들은 흐르면서 "해답이 여기에 있소." 하듯이 고민을 해소해주니 흐르는 게 고마울 때도 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라 니체는 '인간은 신도 동물도 아닌 초극되어야 하는 존재다.'라고 말했을까.

동승한 사람이 방향을 코치하면 운전기사 마음대로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육체는 마음이라는 운전기사가 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소나무가 우거지면 잣나무가 좋아한다고 송무백열(松茂栢悅)이라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 또한 흐르는 마음임에야.

# 약력

▶1998년 '한맥문학'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청풍문학회 회장 역임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칡꽃 향기'

▶중부매일 '수필 & 삶'집필 중

▶충청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 지원단장 역임

▶현재 청주시 1인 1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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