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병수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지역문화재생팀장

무심천의 야경 / 중부매일 DB

김 형!

둑방길 벚나무 들이 사시나무입니다. 엄동과 설한의 계절에 평안한지요. 무심천에 오면 이 도시에서 추억이 있는 여느 사람처럼 기억 한 조각을 길어 올리게 됩니다. 오늘 그렇게 불러보게 되는 김 형!. 우리가 마주한지 벌써 1년여가 흐르고 있습니다. 세월은 쏜 화살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날 우리가 만난 곳은 서울 상수역 근처 길 모퉁이에 좁다랗게 올라간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이었죠.

오래되어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수고 새 건물을 올리는 세태에서 개발의 먹잇감이 되지 않고 용케도 살아남아 공연장을 겸한 카페로 변화한 곳이었죠. 이처럼 오래된 이 거리를 생기 넘치는 핫 플레이스로 변화시킨 사람들은 바로 청년예술가였습니다.

건물의 중정이라고 할 만한 지점에 바닥을 뚫어 1층과 지하 공연장이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한 착상 자체로도 세련된 공간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건축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장소이지요. 거리에 다시 넘쳐나는 행인들을 보며 사람의 감각과 능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그 날 지난 삼 십여년 간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지난 세월의 먹고살아감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지만 아무래도 고등학교시절 청주에서 함께 경험했던 추억의 대목에서 더욱 짙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막걸리에 깍두기 안주를 놓고 장차 시인의 삶을 토로하던 육거리시장 순대집, 첫 시전을 열었던 중앙공원 옆 청주문화관과 모임의 이름과 똑같은 비발디의 바이올린협주곡 '사계'가 울려 퍼지던 1층 전시실, 모임 뒤풀이의 단골 장소로 이용했던 중앙공원 정문 앞 '신흥반점'... 우리의 추억어린 이야기는 그 장소를 떠올리면 마치 기억을 잃었던 사람이 어느 장소에 발을 딛고서 기억의 실타래를 한 올씩 길어 올리듯, 사라졌던 길이 다시 열리는 듯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습작과 시전과 문집과 합평 활동에 기를 쓰던 그 시절은 분명 제 인생의 소중한 과정이었습니다. 지금 그 시간은 흘러갔지만 그 때의 기억을 제 옆에 머물게 하는 장소와 공간은 아직 제 곁에 있습니다. 삼십여년 만의 그 날 우리의 만남도 상수동 카페라는 장소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되겠지요.

김 형!

지난 해 늦여름 열렸던 청주야행의 골목길은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라져간 기억을 함께 길어 올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람 불고 낙엽 날리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던 그 골목의 해장국집 담장아래서 청년들이 펼치는 추억의 댄스를 보노라니 허물어져가는 벽돌담장에도 생기가 오르는 듯 했습니다. 인간의 뇌는 적당한 추억이면 기억에 담아 두려하고 견디기 힘든 기억이라면 영원히 지우고 싶어 한다지요. 그렇다고 모두 부수어 버릴 수도 없는 까닭은 우리가 그 기억 위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낡은 장소를 없애 버린다는 것은 나의 기억과 다시는 화해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병수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지역문화재생팀장

김 형!

제가 걸어가는 지금의 길이 그 때의 경험과 장소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답다는 것은 의미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사람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한 조건 가운데에 '의미있는 장소'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무심천 변에는 금속활자로 만든 책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직지심체요절'의 제작처 흥덕사가 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에는 사람이 잘 살아가는 한 방편으로 '무념무심'의 종지가 담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 편지는 흥덕사에서 띄워보겠습니다. 그럼 여여한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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