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 제99주년 3.1절 맞이 나라사랑 기념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삼창 행진을 하고 있다. 2018.02.26. / 뉴시스

기미년 만세운동. 일제는 단순히 태극기 들고 만세를 외치는 비폭력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총으로 쏘기를 주저치 않고 칼로 베기를 서슴지 않았다. 붙잡아다 재판에 넘긴 사람이 17,990명, 재판에 넘겨 유죄 판결한 인원이 8,471명, 징역형을 내린 사람이 5,156명. 목숨을 잃은 사람도 553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건 일본 측의 기록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그의 몇 배가 될 지도 모를 정확한 피해 규모도 파악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해 저들은 시위 군중을 향해 마구잡이 총질을 해 대고 주저없이 칼을 휘둘렀다.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고문했다. 고문은 악랄하여 당하는 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오락가락했다. 개까지 동원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다는 증언도 있다. 3.1운동 직후 남산의 왜성대 감옥에 갇혀 있던 송진우는 옷이 갈가리 찢기도록 고문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지하실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때 사나운 개들이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강영준 등 여학생 31명은 발가벗긴 채 두들겨 패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유방을 지지는가 하면, 체모에 고약을 녹여 붙였다가 굳은 뒤 급히 잡아떼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민족 대표 중 양한묵은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사하고, 손병희는 초주검 상태로 풀려났으나 곧 운명하고 말았다.

만세운동 뒤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했지만 속임수였다. 식민주의 폭력은 갈수록 흉포해져 고문하며 죽이는 일이 일상처럼 자행되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확전시켜 가던 시기, 한반도는 거대한 감옥이나 형장에 다르지 않았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朱基徹)목사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참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1944년 끝내 순교했다. 그가 네 번째 붙잡혀가던 1939년 9월의 어느 날 아침, 모처럼 온 가족이 아침상을 받았다. 겨우 첫 숟가락을 뜬 순간 문짝이 부서져 나가면서 고등계 형사 두 명이 들이닥쳤다. 주기철 목사는 갑자기 부엌 쪽으로 난 쪽문을 통해 도망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가능했겠는가. 도로 들어와 마루 기둥을 붙든 채 무너져 내린 주 목사가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육신의 고통을 더는 못 견디겠으니 빨리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며 울었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으면 순교를 각오하고 이미 세 차례의 옥고를 경험한 성직자의 믿음으로도 두려워 도망치고자 하고 처자식 앞에 통곡을 하게 했을까. 일제 말기, 식민주의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일은 이처럼 단말마의 고통을 각오하고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전향의 길을 택했다. 중국에선 '동양의 마드리드'라 불리던 무한3진이 함락당하자 힘겹게 지탱해 오던 국내 지식인들의 신념체계가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전향자들이 속출하고 앞다퉈 '친일'경쟁에 나선 듯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친일'의 굴레를 쓰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한 사람들이다.

문재인 정부가 지난 1962년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수여한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지금의 대통령장)의 취소를 의결했다. 일제 말기 '친일' 행적을 문제삼은 것이다. 잘한 일 아니다. 어이없고 가소롭고 철면피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평생을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살아온 일제 말기의 애국 지식인들에게는 사는 일이 오히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래도 삶을 도모한 사람들은 죽음이 능사가 아니고, 욕되게나마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일도 죽어 이름을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지키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판단이었을 수 있다. 생각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며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모진 수모와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아 나라를 세우고, 후대들이 온갖 것 다 누리고 사는 오늘의 토대를 이룬 선조들의 공과를 그리 함부로 입질에 올리고 멋대로 재단하려 들다니 망령되다. 인촌 선생의 경우만 해도 피어린 독립운동사에 남긴 자취가 선명한데 과(過)보다 몇 배나 더 클 공(功)을 철저히 외면한 채 '친일'의 주홍글씨를 새기려 들다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망측스런 일인가. '친일'이란 일신의 영달이나 안위를 위해 솔선해 일제와 팔을 겯고 나선 이들에게나 합당한 굴레다. 엄청난 물리력의 횡포와, 장난삼아 인명을 해치던 집단적 광기 앞에서 저들의 칼 끝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총구의 방향을 따라 뛸 수 밖에 없었던 소극적 '대일 협력' 행위를 정죄하려 드는 국가 권력은 식민주의 횡포보다도 더 파렴치하고 잔인하다.'친일'이라는 말 함부로 써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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