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씨 제공

나이 들면서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좋은 친구가 더 필요하다고 하지만, 전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친구도 있다. 누구 하나 가까이하려는 사람이 없는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곁에 와서 웃음 짓고 있는 병(病)이라는 잔미운 친구다.

한번 가까이하면 떼어내기가 쉽지 않아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혼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아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바쁜 생활 속에서 한나절을 소비해야 하는 시간이 아까워 병원 가는 날은 심란하다.

병원으로 가는 길목 개신문화회관 앞을 지나는데 어수선한 마음으로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싱그럽고 환한 미소가 살포시 피어오른다. 오후에 전반기 학위수여식이 있는데 오전부터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이 예쁘게 포장되어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고 있다. 장미, 프리지어, 안개꽃 등 각양각색의 향기로운 꽃이 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니 뒤숭숭하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미소가 지어진다.

빨간 장미꽃만 보면 소중한 추억이 떠오른다. 잠깐에 스침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예쁜 아기와 만남이다. 어머님의 병환으로 생활 리듬이 깨진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삶이 버거울 때, 신선한 청량제 같은 아기와의 만남은 캄캄한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었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아주 예쁘게 커서 어엿한 사회인이거나 대학 졸업반 정도 되었지 싶다.

어머님은 골반을 다쳐 옴짝달싹하지 못하셨다. 낮에는 간병인이 있지만, 밤에도 수시로 기저귀를 갈아 채우느라 가족들이 도와주어도 몇 년 동안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만성피로에 시달렸다.

하루하루 버티기 힘들었으나, 여성 공무원도 관리자로 승진시킨다는 소리에 직무교육을 신청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절반이 경력 5년도 안 된 젊은이들이었다. 나이 탓으로 부끄러운 생각도 드는 데다 시간표를 보니 2주 연수 동안 논술평가, 수행평가, 분임발표, 객관식 평가까지 수시로 평가가 있어 중압감이 밀려왔다.

설상가상 조카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병문안 갔다가 자동차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데 어떤 남자가 뒤에 와서 부딪치는 척 넘어지더니, 우리 차에 다쳤다며 연기를 한다. 십여 일을 시달리다 경찰서에 신고하고서야 교통사고사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마음은 다급한데 이런저런 일로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아 애가 탔다. 그런 데다 마지막 객관식 시험 전날 할머님 제사까지 있어 새벽 한 시까지 뒷설거지를 끝내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악몽에 시달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몸살감기가 오는지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몽롱한 상태에서 시험지를 받아드니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간신히 끝내고 집에 오는데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겹쳐 눈을 뜰 수가 없다. 의지 하나로 꿋꿋하게 버텼는데 실망감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솔로몬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되새겨 보지만, 허허롭기만 했다.

자리에 누우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미용실을 찾았다. 손님이 많아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예쁜 원피스를 입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아기가 아장아장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예쁘게 포장된 빨간 장미꽃을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아가야! 이 꽃 아줌마 주는 거야?"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왜? 하고 물어보니 귀여운 말투로 "그냥!" 하면서 배시시 웃는다.

유독 꽃을 좋아하는 나는 전혀 모르는 아기한테서 장미꽃을 받고 어리둥절했지만, 매우 기뻤다. 하지만, 받을 수 없어 되돌려주니, 아기는 던지듯 내 무릎에 장미꽃을 올려놓고는 생글방글 웃으며 엄마한테로 간다.

생각지도 못한 찰나의 행복에 만족하며, 아기엄마에게 꽃을 돌려주니 우리 아기가 준 것이니 그냥 가져가란다. 감사한 마음에 꽃값을 주니 한사코 사양한다. 아기 손에 겨우 쥐여 주고, 집으로 오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휘청휘청, 흔들흔들하던 무거운 발걸음이 사붓사붓 해졌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꿈과 희망은커녕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아기천사가 내 삶의 무거운 짐을 모두 거두어 간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힘든 고비를 잘 넘기고 승진까지 하였으니 하느님께서 행복 전령사를 보내주신 듯하다.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장미꽃만 보면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예쁜 아기! 천사처럼 다가와 장미꽃을 선물한 그 아기야말로 행복 전령사란 생각을 해보며, 지나간 것은 추억인데 소중한 추억을 꺼내보는 행복을 준 그 아기에게 꽃길만 있었으면 한다.

이난영 수필가

볼수록 주인을 기다리는 꽃다발이 화사하다. 설렘과 행복 가득, 알찬 결실을 보는 졸업생 모두에게 새로운 세상으로의 힘찬 도약을 기대한다. 그러나 기쁨과 기대감보다 불확실한 미래에 두렵고 불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졸업 축하 꽃다발이 자신 있게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미지의 찬연한 희망을 품은 행복 전령사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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