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숭상한 세종 임금은 책을 너무 많이 읽다보니 안질을 자주 앓았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훈민정음)은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과 함께 임금의 안질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의 안질과 약수, 초정(椒井)행차를 이렇게 적고 있다. 세종 26년(1444)정월에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었다. 청주(淸州)에 물 맛이 후추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초수(椒水)라 이름하였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임금은 이를 듣고 내섬시윤(內贍侍尹)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물을 얻어와서 아뢴 사람에게 무명 열 필을 하사하였다.
 세종은 바로 거동치 않고 신하를 보내 그 효험을 미리 시험토록 했다. 전 목사(牧使) 김췌(金萃)와 전 만호(萬戶) 유면(柳沔) 등을 보내 안질에 효과가 있는지를 알아본 것이다.
 그 다음달, 임금은 왕비와 함께 초수리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세자도 동행하였다. 임금의 어가는 사흘만에 초수리에 도착하였다.
 우의정 신개가 호종하는 신하를 거느리고 행궁에 나아가 축하하여 아뢰었다. 열자(列子)에 말하기를 호령(壺領) 마루에 구멍이 있어 이를 자혈(滋穴)이라 하고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것을 신분이라 하였는데 냄새는 초란(椒蘭)보다 더하고 맛은 요례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광무(光武)때에는 예천(禮泉)이 장안에서 솟아나와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은 고질병이 모두 나았다고 합니다. 초수의 냄새와 맛이 옛 글에 실린바와 비슷하오니 즐거움과 기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종은 안질을 고친다는 기쁨보다도 자신의 행차로 인해 백성이 불편함을 겪을 것 같아 이를 추스리는 세밀함도 보여주었으니 애민사상이 아니고 무었이랴.
 임금은 청주에 나이 80세 이상된 25명의 노인에게는 각각 벼 두 섬과 콩 한 섬씩 주고 70세 이상된 노인 30명에게는 각각 콩 한 섬씩을 주었다. 또 초수리 인근 농민 38호에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며 감고(監考) 박배양(朴陪陽) 등 8명에게는 면포를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초정행차시 토지를 밟아 종자를 뿌릴 수 없게 되자 해당 농가에 쌀과 콩으로 보상을 해주었고 승지에게 명하여 초수에 갈 때에는 임금의 수레를 따를 인마(人馬)와 비용을 적당하게 감소토록 하였다.
 임금은 그해 여름 초수에 또 행차하였는데 이에따른 민원이 발생치 않도록 명을 내렸다. 학향 청주를 배려하여 청주향교에 통감훈의(通鑑訓義) 성리군서(性理群書) 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책을 한벌씩 내리고 학생들이 이를 익히도록 하였다.
 며칠전 초정약수축제에서 세종 임금의 어가 행렬이 재연되었다. 장엄한 어가와 임금의 목욕하는 장면 등이 6백년만에 축제로 되살아난 것이다. 한글창제에 피로한 몸과 마음을 때때로 초정약수로 달랬으니 초정의 효험은 일찍부터 검증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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