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교사 이야기] 곽효정 청주 남평초등학교 수석교사

/ 클립아트코리아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말 그릇'.

지난 해 말 서점가에 베스트셀러로 올라온 책들로 모두 우리의 말과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 책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후에도 그 따스함이 오래도록 남아 '나의 언어의 온도는 얼마나 될까?' 생각하던 중, 오래 전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로 상처 받아 힘들게 보냈던 기억이 또렷이 되살아나며 나의 한 마디로 아이의 마음을 모두 잃을 뻔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몇 년 전 1학년 담임을 할 때 수학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학습 주제는 '10 가르기와 모으기'였다. 구체물 조작을 통해 스스로 재미있게 배우기 위해 바둑돌과 10개 들이 계란 판이 필요했고 계란 판은 아이들의 개인 준비물이었다.

계란 판을 준비하지 못한 아이가 한 명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각자 준비해 온 계란 판과 바둑돌을 책 상위에 올려놓고 바둑돌을 이리저리 계란 판에 옮겨 담으며 재미있게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못한 아이는 책상 위에 색종이 한 장을 꺼내놓고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그 아이가 얄밉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엇을 그리는지, 왜 그리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준비물도 없으면서 딴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는 준비물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면서 색종이 가지고 딴 짓까지 하고 있니?'하고 야단을 치려고 했다. 그러다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 "지금 색종이로 뭐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질문을 바꾼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선생님, 깜빡 잊고 계란 판을 가지고 오지 못해 색종이에 계란 판처럼 칸을 그려서 하려고요"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을 듣는 순간 그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대답을 듣고 보니 색종이에는 계란 판의 칸과 비슷하게 10개의 칸이 그려져 있었다. 내 멋대로 판단하여 색종이를 가지고 딴 짓하는 줄 알고 야단치려 했던 마음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 참 좋은 생각이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라고 진심으로 칭찬했다.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 주눅이 들어 움츠리고 있던 그 아이는 금방 얼굴이 환해지며 신나게 활동하였다.

그 때 만약 그 아이의 생각을 듣지도 않고 먼저 야단을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 아이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자기의 마음도 모르고 야단부터 친 선생님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미웠을까? 말 한마디로 아이의 마음을 몽땅 잃을 뻔 했다.

곽효정 청주 남평초등학교 수석교사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입장을 듣지 않고 내 맘대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깨달았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아이들의 말에 먼저 귀 기울이자.' '내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자.' 그 일 후 지금도 어떤 상황을 만날 때, 앞서가는 생각과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상황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하니 아이들의 마음이 저절로 나에게 온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 참 쉽다. 아이들의 마음이 온전히 교사에게 올 때만큼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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