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칼럼]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안희정 전 충남지사 / 중부매일 DB

4년 전 겨울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안희정은 단정한 얼굴에 논리가 정연하고 목소리는 조근 조근 했지만 열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당시 그는 20년간 정치에 몸담았지만 충남지사가 유일한 선출직이었다. 정치적인 위상과 인지도에 비해 경력은 짧았다. 하지만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고 온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충청권대망론'에 그의 이름이 겹쳐졌다. 노무현 전대통령과의 인연이 정치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는 2001년 대선 때 노무현 캠프 사무국장을 맡아 참여정부 출범에 기여하면서 노무현의 최측근으로 이광재 전 강원지사와 함께 '좌 희정^우 광재'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신망이 두터웠다. 하지만 대선자금 관리자로 책임을 지고 1년간 옥고(獄苦)를 치르면서 참여정부 5년간은 거의 백수로 지냈다. 안희정에게 기회가 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MB정부 시절이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최초로 충남지사에 당선되면서 '친노계의 미래'로 떠올랐다.

당시 그에게 지금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이문열의 소설 제목처럼 더 높게 비상하려 할 때 그는 날개를 잃었다. 그의 몰락을 지켜 본 지지자들은 분노와 허탈감 그리고 '정치무상'을 느꼈을 것이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랄까. 차기를 노리는 '스타정치인'은 많지만 안희정 만큼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도 흔치않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은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다. 젊음과 경륜이 조화를 이룬 나이도 차기를 도모하기에 적당하다. 합리적인 진보로 협치(協治)를 중시했던 정치적인 성향도 주목받았다. 그는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라는 저서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유신과 경제성장의 공과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자"고 했으며 "과거를 갖고 싸우면 현재와 미래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이제는 대한민국에 이뤘던 성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용력있는 정치지도자라는 시각을 드러낸 그의 몰락을 아쉬워 사람도 많다. 그는 도지사로도 나름 인정받았다. 리얼미터의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장 정기 지지율 조사에서 단 한번도 1위를 내준 적이 없다. 치적을 남기거나 도정을 잘 운영한 것은 아니지만 대권주자라는 기대감이 그의 성가를 높였다. 주식으로 말하면 '실적주'가 아니라 '성장주'다. '친문'의 견제를 받았다지만 차기 유력한 잠룡(潛龍)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 아는 대로 그의 정치인생은 순식간에 끝장났다. '성적욕망'의 과잉 때문이라기보다 권력만능의 권위주의적인 가치관 때문이라고 본다. 그의 후광을 업고 충남지사 바통을 이어받으려 했던 박수현 전청와대 대변인은 불륜설에 휘말리면서 중도하차했다. '안희정 마케팅'으로 재미를 보려고 했던 그의 정치적 인맥은 얼굴을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안희정 식으로 얘기하면 그들은 '폐족'이 됐다.

나꼼수 김어준은 안희정을 끌어내린 '미투운동'에 대해 공작설을 유포하지만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다. 보수정당은 그만한 능력도, 힘도 없다. 미투운동이 문화계 권력들의 거짓된 가면도 벗겨냈지만 가식과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정치인의 실체를 드러낸 것도 큰 의미가 있다. 만에 하나 안희정 같은 정치인이 청와대로 갔으면 어땠을까. 입은 늘 새 정치를 달고 다니면서 가부장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떤 기막힌 일이 발생했을지 모른다.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세상은 달라졌지만 봉건적 사고방식은 그대로인 정치인이 어디 안희정 뿐일까. 국가지도자의 막장드라마는 보고 싶지 않다. 미투운동은 정치인의 피상적인 이미지에 매몰된 유권자들에게 경종이 됐을 것이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6.13지방선거가 90일도 안 남았다. 각 정당에서는 공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공천과정에서 부적격자를 걸러낸다고 하지만 믿기 어렵다. 능력과 전문성, 도덕성은 뒷전이고 오로지 충성도가 일순위다. 그렇지 않다면 전과자와 막말꾼들이 공천받을리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 한다'는 그래샴의 법칙이 재현될 것이다. 이렇게 뽑힌 후보 중에는 지방자치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퇴색시킨 사람들이 널려있다. 대중들이 과대 포장됐거나 '포토샵'처리된 후보들의 진면목을 보는 혜안을 갖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후보들이 얼룩진 과거를 감추기도 쉽지 않다. 큰일을 도모하려면 젊은 시절부터 자기관리와 처신이 엄격해야 된다. 언행일치도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일을 알고 있다'. 공포영화의 제목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후보의 추악한 민낯이 미디어와 SNS를 뜨겁게 달굴지 모른다. 가혹한 현실이지만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안희정은 훌륭한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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