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23. 티 스토리텔링

봄날의 아지랑이를 연상하는 차 자리는 없을까? 한여름 파도 위를 질주하듯 시원한 차 자리는. 핏빛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아름다운 가을의 향연을 어떻게 연출하지? 하얀 눈 속 매화의 향기가 오롯한 차 자리를 어떻게 표현할까?

차 예절원 개강을 앞두고 즐거운 고민을 한다. 축하차 오신 분들에게 정성을 담은 차 한 잔도 충분한 교감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싶었다. 차는 이미 마시는 기호음료의 선을 넘어 문화적 예술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혹자는 간단한 도구에 차 한 잔 마시는데 무슨 예술이냐고? 그러나 눈으로 보고, 향을 맡고, 맛을 보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작용이 일고 그 일이 시각적인 공간을 넘어 심미안에 도달하는 행로가 된다면 차 문화의 예술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초심(初心)이라는 주제의 티 스토리텔링을 준비했다. 연잎 모양의 다포 위에 작은 다구들을 올려놓고 늘어진 버들잎과 노란 설탕 꽃을 꽂은 다화를 연출했다. 아담한 차 자리에 샛노란 봄이 펼쳐졌다. 아름답고 이색적인 분위기에 차는 마시기도 전에 취한 듯 농후한 분위기로 이어진다. 옹기종기 놓여있는 알사탕만 한 찻잔을 보고 찻잔까지 마셔야 되냐고 너스레를 떤다.

우전차로 우려낸 농차(濃茶)를 간장종지보다 작은 찻잔에 부었다. 한 모금 머물다 삼킨다. 제호나 감로가 이런 맛일까. 아님 눈밭에서 딴 춘설차의 맛일까. 고농축 액체가 혀를 타고 오장을 탐닉하는 순간 온몸의 촉각이 곤두선다. 욕망으로 인해 잠들어있던 맑은 영혼들이 솟구쳐 올라온다. 각박한 생활고에 찌들어 품고 다니던 티끌들이 스스로 녹아내리니 몸과 마음은 초심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진면목을 일깨우고 아름다움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차 자리. 진정, 창조적 예술이 아닐까.

봄볕을 담은 뾰족한 찻잎들이 수선거릴 때. 차가 많이 나는 지리산이나 보성은 해마다 열린 행사로 분주하다. 각국의 특징을 살린 조화로운 테이블세팅의 경합, 나라마다 다른 차 종류, 차 시음과 차 음식 등 거대한 축제가 열린다. 특히 보성은 음식과 꽃, 풀, 자연, 기후, 역사를 세시풍속(歲時風俗)을 토대로 보성의 숨결이 담긴 차 문화의 멋과 풍류를 잘 살려내고 있다.

이렇게 반짝이는 차 문화도 따지고 보면 선조들의 영향이 크다. 차의 전파로 한 몫 한 불교의 차 문화도 수행을 위한 의식이었고, 신선사상의 도가의 차 역시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위한 인간의 욕망을 담은 실천 행위였다. 전국의 명산 대첩을 다니며 학문과 무예를 닦은 화랑도역시 세속오계를 위한 집단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차를 마셨다고 하니 이는 명분이 분명한 티 스토리문화였던 것이다.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차문화가 융성했던 고려시대는 국가적인 중요행사의 의식과 의례에 차가 매개체가 되었고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란 형벌을 가할 때, 차를 마시고 심중한 결정을 내렸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소교가 우려 준 차를 마시지 않았다면 전쟁에 패했을까. 한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도 차는 윤리도덕을 초월한 그 이상의 길을 역사와 함께 향유했다.

오늘 소박한 이 차 자리가 아름답게 기억되고, 눈부신 내일의 희망으로 다가올 때 맑고 향기로운 티 스토리텔링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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