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전문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시원한 도로나 아파트가 별로 없다. 대신 좁은 골목길과 기와집을 만날 수 있는 정겨운 동네다. 처음 이사 올 때는 기와집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 이후 기와집 이 있던 자리에 2층 주택이나 원룸, 연립 등이 생겨났다. 그래도 여전히 옛 풍경을 만날 수 있는 따듯한 동네다. 이런 집에 따라 다양한 대문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다. 대문은 비슷하면서도 나름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철대문도 있고 촘촘하게 나무를 잘라 만든 대문도 있고, 펜스대문도 만날 수 있다. 요즘 날씨가 푹 해지면서 대문 앞에 꽃 화분을 내 놓는다.
꽃 화분을 보다가 그만 눈이 둥그레졌다. 그 옆에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대문을 만났기 때문이다. 대문 안쪽에 가로질러 잠금장치를 하던 빗장이 있는 나무대문이었다. 모처럼 만난 그 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낡고 작은 대문이었지만 세월을 먹은 흔적이 더 반가웠다. 초등학교 때 우리 집 부엌대문이 떠올랐다. 우리 집 대문은 함석대문이었고, 부엌문은 좁다란 나무문으로 빗장이 있었다. 또래들보다 키도 작고 몸도 작은 난 혼자 있을 땐 부엌문에 매달려 놀곤 했다.
그러다 심심하면 곱돌이나 운 좋게 구한 분필로 낙서까지 하면서 심심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문도 힘들었는지 끼익끼익,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한겨울 큰 고무함지에 목욕이라도 하는 날에는 부엌대문 빗장이 잘 걸려 있나, 확인하곤 했다. 고학년이 되면서 미술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그리던 이젤이 무척 신기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바로 우리 집 함석대문에 빨래집게로 도화지를 고정해 놓고 그림을 그리는 거였다. 여름방학 숙제로 아주 큰 종이에 숲속 풍경을 그렸는데 이때 함석대문 이젤은 큰 역할을 했다.
수채화의 물맛을 마음껏 살릴 수 있었다. 함석대문에 걸린 내 그림을 멀리 가서 다시 가까이 와서 흠뻑 취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어머니는 마당 함석대문에 워낭 하나를 달아 놓았다. 그래서 누군가 오면 워낭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집에 오시는 아버지의 함석대문 여는 소리는 참 반가웠다. 한 달에 한두 번 밤에 오실 때도 있었는데... 달빛에 울리는 워낭소리는 그저 아버지의 소리였다.
함석대문의 잠근 장치는 독특하고 단순했다. 빙글빙글 모기향 같은 또는 초등학교 때 숙제를 잘 하거나 시험을 잘 보면 선생님이 빨간 색연필로 빙글빙글 그려주시던 나이테 물결 같은 철사였다. 굵은 철사를 그렇게 만들어 빙글빙글 돌려 잠갔다. 허겁지겁 잠그거나 잘못 잠그다 철사에 찔리거나 긁히기도 했다.
이런 대문은 어떻게 보면 그 집의 느낌을 첫 번째로 알려주는 것 같다. 잘 키운 덩굴장미를 줄줄이 올린 대문, 더러는 능소화를 주절이주절리 늘어뜨린 대문도 있다. 어느 집 대문은 폴짝 뛰어 넘어갈 정도로 낮고 귀엽다. 다양한 대문이 있는 골목길은 걷는 재미도 좋다. 구불구불 정겨움이 묻어난다. 소박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도 솔솔 풍겨온다.
또한 대문은 사람들도 하나씩 갖고 있는 것 같다. 바로 마음의 문이다. 더러는 자신만을 위한 욕심을 채워 아주 가끔은 이기적인 문일 때도 있다. 내가 필요한 사람에게만 여는 문도 있다. 또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는 무관심의 문도 있다.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열어 주고 그렇지 않을 때면 굳게 닫아 놓는 문도 있다. 봄이다. 마음의 문과 대문을 좀 더 정성스레 닦아보자. 봄빛처럼 다가올 그 누군가를 위해 내가 먼저 문을 활짝 열고 따듯하게 반기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