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비단도포 두르고 찾아온 봄의 전령

제천 금수산 산수유마을 전경

눈을 감았다. 뒤꼍에서 새들이 춤추고 노래한다. 마당엔 일찌감치 햇살이 놀러왔다. 굳게 말문을 닫고 있던 대지는 봄비에 화들짝 놀라 트림을 하고 있다. 나는 알았다. 봄이 오면 새들의 노랫소리부터 낭창낭창 신나고 햇살도 눈부시며 빗방울까지 맑은 기운 가득하다는 것을, 그래서 산과 들이 놀라 얼었던 몸을 풀기 시작한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새 순 돋고 꽃대가 올라오고 있다. 조만간 지천으로 꽃망울이 터질 것이고 붉게 물들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봄에 피는 꽃을 보며 빛의 파도에 휩쓸린 것 같다고 했다. 빛과 바람과 나비가 꽃에게 사랑을 구하고, 꽃은 삶을 향해 불안한 가슴을 연다고 했다. 대부분의 식물은 잎이 먼저 나고 꽃이 피는데 봄꽃은 꽃부터 핀다. 벌과 나비들을 유혹해 가루받이에 성공해야 종족 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종은 경쟁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북풍한설을 딛고 일어선 꽃은 아름답다. 눈 속에서도 꽃대를 일으켜 세우는 매화를 보라. 화려하거나 요란하지도 않고 눈에 확 들어오지도 않는다. 작지만 오종종 예쁘다. 향기롭다. 가슴에 스미고 물들며 젖는다. 찰나의 아름다움은 미칠 정도로 치명적이다. 감았던 눈을 떠 본다. 모든 것이 새롭다. 나의 삶도 한 송이의 꽃처럼 누군가의 희망인지 묻는다.

금수산은 기암절벽 사이로 소나무의 푸른 기개가 넘친다.

봄꽃의 백미는 매화와 산수유다. 남녘에서부터 매화가 봄소식을 전해온다. 얼었던 대지를 뚫고 꽃대를 들어 올리는 강인함 속에 여린 생명의 미학이 담겨있다. 산수유는 봄의 왔음을 온 천하에 알리는 전령이다. 이때부터 개나리가 피고 복사꽃과 오얏꽃이 흐드러지게 피며, 진달래와 벚꽃도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산수유를 만나려면 전라도 구례나 하동으로 가야 하는 줄 알겠지만 제천 수산면 상천리에도 산유수가 지천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아랫마을을 백운동이라고 부르고 윗마을을 초경동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금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이 빼어난 산이라며 금수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비단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산과 계곡 사이에 상천리 마을이 있는 것이다.

백운동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용담폭포에 이르는 돌담길 주변에 산수유가 봄을 노래하고 있다. 수령 100년이 넘은 자생 산수유다. 마을 전체가 노랗게 물들었고 금수산은 기암절벽 사이로 소나무의 푸른 기개가 넘친다. 마을 입구에 수령 600년 된 늠름한 노송군락지까지 있어 마을은 한 폭의 산수화다.

상천 산수유 마을 입구에 위치한 안내 비석

비슷한 시기에 산에는 생강나무가, 마을에는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운다. 산수유는 스스로 발아하기 힘들어 사람이 심어주어야 자란다. 그래서 마을이나 민가에 많다.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둘 다 여러 송이의 꽃이 모여 달리지만, 생강나무 꽃은 가지 끝과 중간에 꽃자루 없이 동글동글 꽃의 몸체가 바짝 붙어 달린다. 산수유 꽃은 여러 송이가 긴 꽃자루 끝에 달려 폭죽처럼 터지는 모양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100여 년 전에 산수유 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니 그 마음 얼마나 고운가.

산수유 꽃이 지천으로 가득하니 벌들의 잉잉거리는 소리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미 내 마음은 노랗게 물들었는데, 벌들까지 허기진 마음을 후벼 파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래서 소설가 김훈은 산수유를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표현했다. 마을의 돌담과 계곡에 파스텔처럼 노란 물감이 번져 있다. 식물에는 엄마의 자궁과 같은 방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씨방이다. 그래서 꽃은 식물의 성기다. 벌과 나비들이 이곳을 서성거리는 것도 생존의 본능이다. 그 본능으로 무장돼 있지만 성스럽다. 경이롭다. 선택받은 꽃가루는 엄마의 씨방 안에 있는 밑씨와 만나 2세를 잉태하게 된다.

노랗게 피어난 산수유 꽃은 여름을 지나고 늦가을에 붉은 열매가 되어 마을 전체를 또 한 번 물들인다. 북풍한설을 딛고 일어난 노란 꽃이 모진 비바람과 태양을 견딘 뒤 붉게 타오르며 한 생애를 마감한다. 그 붉은 열매는 사람의 혈액을 타고 흘러 아픔을 치유한다. 사랑과 추억을 만든다. 시인 김종길은 '성탄제'라는 시에서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며 아버지의 그림과 산수유 열매의 치유적 마력을 노래했다.

그래서일까. 산수유가 가득한 이 마을에는 봄 여름 가을 도시에서 달려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숲과 계곡과 마을의 때묻지 않은 풍경을 보며, 돌담 사이의 이름 모를 야생화를 보며, 가슴을 뚫고 달려오는 노송들의 기개를 보며, 산수유 노란 꽃과 붉은 열매의 예쁜 풍경을 보며 생각한다. 내게도 사랑이 있던가. 누군가에게 붉은 약이 되고 희망이 되고 있는가. 꽃의 인문학, 꽃의 생태학을 보며 더욱 강건할 것을 다짐한다. 글·사진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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