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조형숙 서원대학교 교수

자료사진 / 중부매일 DB

아들은 아예 풀이 죽었다. 처음에 과학고에 합격했을 때는 신바람이 났고, 입학할 때는 발그레 설레던 그 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다. 발랄하고 엉뚱하기 짝이 없던 어린 녀석이 가뭇없이 사라지는데 단 1년이 걸렸을 뿐이다. 과학고 학생들은 대부분 수능 최저학력기준의 적용을 받지 않는 과학고 수시전형으로 진학을 하기 때문에 학교 내신이 매우 중요하다.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아이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패잔병이 되었다. 외부장학금은 성적순이다. 체험활동도 성적순으로 선발한다. 해외 교환프로그램도 성적순으로 선발한다. 과학고에서 행복은 성적순이다.

"엄마 난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서 왕따거든." 가장 불행한 아이부터 일반계 고등학교로 전학 행렬이 이어졌다. 100명 중 100등이 전학을 갔고, 그 다음 99등이 전학을 갔고, 98등이 차례로 전학을 갔다. 아들은 40등 대에 입학했고, 지금 40등 대에 머물고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문제를 물으면 부드럽게 거절당하거나, 차갑게 거절당한다. 아들 녀석은 거의 반쯤 넋이 나간 채 미쳐있고 때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공부를 한다. 전학을 안가겠다고 오기를 부린다. 그게 오기인지 인내심인지 삶에 대한 투지인지 부모인 나도 알 수가 없다.

아들 녀석이 다니는 학교에 교사로 있는 동창이나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과학고는 '어머나 너 힘들지' 하면서 위로해주는 건 없어. 머리 좋은 놈이 이기는 정글이고 그 속에서 그냥 버티는 놈은 이 정글에서 살아서 나가는 거야." "여기는 힘들어하는 아이들한테 우쭈쭈 영차영차 달래주는 곳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데 더 이상 물어볼 여지도 없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학부모 모임에 나갔다. 엄마들에게 배운 게 있다. 군인 사회에서 아내의 서열은 남편의 계급대로라고 했든가. 과학고 엄마들 모임에서 반장 엄마는 사회자 역할을 한다. 반에서 1-3등을 하는 아이의 엄마가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의사결정 표시를 한다. 하위권 아이의 엄마는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다. 나 같은 엄마가 의견을 내거나 의사결정에 참여하려고 하면, 그 힘의 역학이 깨어지기 때문에 일순간 다들 당황스러워 한다.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다. 나는 눈치를 배웠다.

1학년 중간고사 때 전교 2등을 하면서 임팩트있게 출발했던 아이의 엄마는 교양 있는 어투로 여러 가지를 주도했다. 내가 평소 느낀 것 보다 지난 모임에서 그 엄마는 겸손하면서 교양 있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정우(가명) 엄마를 잘못 보았나봐 했더니 아들 녀석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정우는 계속해서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 엄마가 모임에서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풀이 죽어있는 걸 보았다. 가끔은 비굴한 웃음을 띠기도 한다. 집에 돌아와서 아들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은서(가명)가 몇 등 하는지 아니?" "반에서 뒤에서 1-3등쯤일걸." 새 정부의 교육정책이 바뀌면서 자사고와 외고는 폐지될 전망이지만, 특목고 군단에 과학영재학교와 과학고가 여전히 남아있어 경쟁은 더욱 치열해 질 것이다. 여전히 행복은 성적순이고 겸손은 성적과 반비례할 것이다.

조형숙 서원대학교 교수

"난 과학고에 오면 과학실험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일반학교에서 과목 당 한 번 할 때 우리 학교는 두 번 하는 정도야. 그게 가장 안타까워. 책보고 외우는 공부를 많이 하고 주로 문제풀이를 하거든." 정말로 안타깝다. '노벨상의 꿈이 영그는 과학요람'과 '글로벌 Top 10'을 모토로 하는 학교에서 지난 1년간 무엇을 배웠을까? 상을 받고 10등 안에 들어야 그 정글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닐까. 언제까지 토끼몰이 같은 교육을 괘념치 않을 작정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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