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가경천 살구나무길 / 중부매일 DB

고향집 돌담 옆에 살구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꽃이 피면 연분홍 살구꽃 향기가 실려 왔고 꽃이 지면 파란열매가 가지마다 조롱조롱 달리곤 했다. 노랗게 살구가 익으면 나무를 오르내리며 살구를 따 먹었다. 이때 바라보던 살구나무는 더없이 커보였다. 그랬던 살구나무가 베어진 자리에는 어느 날 감나무가 대신했다. 나무가 떨어뜨린 감꽃을 실에 꿰기도 하고 꼭지 빠진 감을 주워 소꿉놀이를 할 때만해도 감나무는 참으로 큰 나무였다. 감나무가 자라듯 내가 어른이 되자 감나무는 더 이상 큰 나무로 보이진 않았지만 고향집에 들어서면 유년의 추억담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것 같았다.

고향집 감나무는 언제나 찾아 가도 그 자리에 있어 좋았다. 세상이 바뀐다고 세월이 흐른다며 백 년을 한곳에서 살 것 같았던 사람은 모두 떠났지만 그는 그 곳을 절대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뿌리는 뿌리대로 땅속을 헤집고, 가지는 가지대로 하늘 길을 향한다. 무심한 듯하지만, 온 힘을 다해 가지를 뻗고 잎을 피워내며 치열하게 살아낸다. 나무에 가만히 손을 대 보면 거친 표피 속으로 수액이 흐르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상허 이태준이 수필〈수목〉에서 봄이 어서 오길 바라며 급하다고 한 표현이 생각난다.

'아무 나무나 한 가지 휘어 잡아보면 그 도틈도틈 맺혀진 눈들, 하룻밤 세우(細雨)만 내려 주면 하루아침 따스한 햇발만 쪼여 주면 곧 꽃피리라는 소곤거림이 한 봉지씩 들어있는 것이다.'

이태준의 수필을 읽다보면 반세기 이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는데 놀랍다. 물이 흐르듯 군더더기가 없다. 글자 하나 첨삭도 불허할 만큼 완벽한 문장이다. 산에 오를 때면 등산길보다는 산책길을 즐겨 찾는다. 꽃과 어린 나무를 보는 것이 좋았다. 운동이 목적이 아니라 꽃과 교감하는 낙(樂)이었다. 막 새잎 돋아나는 소나무를 쓰다듬는다거나 개암나무, 손을 뻗어 오디를 따 먹을 수 있는 뽕나무, 보리수나무가 좋았고, 누가 보지 않아도 피고 지는 진달래, 생강나무, 조팝나무, 물푸레나무 꽃이며 솜나물, 봄맞이, 꽃마리, 제비꽃, 미나리아재비 같은 풀꽃들이 좋았다.

모임득 수필가

하지만 생의 큰 고비를 넘긴 지금은 다르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바람 불면 바람 분다고 심란해하고 호들갑 떨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마음의 크기가 넓어졌다. 나는 예쁜 꽃과 막 돋아나는 나무들과 교감하고 싶은데 세상살이는 나를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말라고 한다. 오랜 세월을 보듬고 그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온 큰 나무처럼 살라고, 이제 한 집안의 가장이라며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래서 <수목〉이란 글이 더 가슴에 와 닿았을 수도 있다. 한 그루의 나무라도 큰 나무 밑에서 살고 싶다는 표현이, 낮은 과목 사이에 주춤거림보다는 큰 나무 밑에서 쉬며 앞날을 생각하고 싶다는 말이 딱 내게 맞는 말인 것 같아서다. 내가 보고 싶고, 위안도 받고 싶을 때 나무는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어서 좋다.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지 가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니까. 작은 나무보다는 나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큰 나무였으면 싶다. 큰 나무가 내게 위안을 준다면 나도 누군가에 힘을 주는 큰 나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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