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따라 새겨진 오래된 역사의 미학

1978년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일대가 수몰되자 각종 문화재들을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왔다. 사진은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입구.

벚꽃은 사월의 눈꽃이다. 필 때도 눈꽃, 질 때도 눈꽃이다. 바람에 흩날릴 때는 세상이 온통 하얀 눈꽃이다. 내 마음에도 연분홍 눈꽃으로 물들었다. 흩날리는 꽃길을 걷는다. 삶이 무량하다. 꽃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맹렬한 추위와 어둠을 뚫고 나온 꽃들이기에 그들의 생명이 더욱 간절하다.

어느 시인은 '꽃이 진다고 너를 잊은 적 없다'며 꽃들을 예찬했다. '꽃은 지지 않는다. 다만 꽃잎이 떨어질 뿐'이라며 꽃들의 잔치에 경배를 한 작가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라며 벚꽃 풍경을 노래한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도 있다. 벚꽃의 백미는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는 꽃잎에 있지 않던가.

꽃도 사랑도 한 철이다. 떨어지는 것은 아름답고도 슬프다. 사위어가는 생명 앞에 서면 가슴이 시리다. 아름답기 때문에 더욱 아쉽고, 그래서 아름다움은 간절하다. 애틋하다. 꽃들은 오늘도 나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르고 있는데 나는 꽃들을 위해 한 것이 없다.

온 세상이 벚꽃천지라는 뉴스에 화들짝 놀라 집을 나섰다. 그래서 제천 청풍호변을 달렸다. 차창 밖에는 온통 꽃들의 잔치다. 햇살도 눈부시고 호수는 반짝인다. 하늘과 숲과 호수를 사이에 두고 꽃들이 춤추고 노래하니 이곳은 꽃들의 무덤이다.

청풍문화재단지 내 보물 제 528호 '한벽루'

"한벽루 높다랗게 자색 하늘에 솟아 있는데, 개울 건너 마주하니 구름 병풍 펼친 것 같네. 막 개인 저녁 외로운 배에 기대어 바라보니, 거울도 아니고 연기도 아니지만 온통 푸르름 덮였네."

퇴계 이황은 청풍 한벽루의 기막힌 풍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고려후기의 문신 주열은 "물빛이 맑고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고, 산기운 어두침침 연기 아닌 연기로다"라고 했다. 조선의 문인 김정이라는 사람은 "확 트인 산천이 볼 만하니, 천지간에 이 경지가 그윽하구나. 바람은 만고혈에서 생겨나고, 강 물결은 오경에 누대를 흔드네"라며 한벽루의 기상을 읊었다.

이처럼 청풍과 한벽루를 노래한 옛 시인들은 수 없이 많다. 시로 남겨진 것만 해도 100여 편이나 된다. 빼어난 절경에 아름답고 독특한 건축양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이곳을 들르는 사람마다 시 한 수 읊었으니 세상은 남겨진 자의 것이고 기록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기념할 것인지 꽃들의 무덤을 보며 상념에 젖는다.

화강석제 고려시대의 불상인 석조여래입상.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청풍은 말 그대로 맑고 향기로운 숲과 물과 바람이 깃든 곳이다. 모든 문화는 물길을 통해 이루어졌으니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의 온기가 그윽하다. 구석기 시대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쟁탈이 치열했으며 찬란한 중원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물길을 이용한 상업과 문물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78년부터 시작된 충주댐 건설로 이 일대가 수몰되었다. 청풍면을 비롯해 5개면 61개 마을이 물속에 잠긴 것이다.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과 꿈도 속절없이 잠겼다. 잠긴 것들은 말이 없지만 역사의 기록은 오롯이 남아있다. 청풍문화재단지를 조성하면서 각종 문화재들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보물, 지방유형문화재 등 53점의 문화재가 잘 다듬어진 경관과 함께 사람들의 발길을 머뭇거리게 한다.

보물 제528호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관아에서 세운 목조난각이다. 관아의 연회장소로 사용했는데 청풍의 시원한 풍광을 즐기기 위해 기둥과 기둥 사이를 모두 개방해 병풍처럼 시원하다. 누각에 올라갈 때는 계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익랑(대문 옆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만들었는데 조선시대 3대 익랑누각 중 하나로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유일한 양식이다. 송시열의 친필로 현판을 세웠다.

이밖에도 청풍문화재단지에는 청풍부의 동헌으로 부사 집무장소로 쓰였던 금병헌, 중앙관리들의 객사용 사용했던 응청각, 관아를 드나들던 금남루 등의 문화재가 배치돼 있다.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망월산성에 오르면 청풍호반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년을 이어오면서 저마다의 애틋한 사연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빛과 바람은 스스로 부서진다. 꽃들이 피고 지는 것도 스스로 그러하기에 새롭다. 반면에 내 마음의 것들은 언제나 부산하고 정처없다. 지나온 삶의 기억과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최고의 행복은 무소유라고 했으니 삿된 욕망 부려놓고 싶었다. 바라건대 나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다면 청풍의 기운이 가슴속에 꽃이 되어 흩날리면 좋겠다. 글·사진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