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불만에 가득찬 한 남자의 투덜거림이 들린다. "내 머릿속에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게 하나라도 있을까?? 한동안 계속되는 탄식 끝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 성긴 곱슬머리에 결코 날렵하지 않은 몸매, 스스로에 대한 지독스런 회의와 불신으로 가득찬 눈동자. 영화 「어댑테이션」의 각색자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이다.
 여기서 잠깐, 영화 바깥의 실제 이야기. 스파이크 존즈감독의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로 일약 스타작가로 부상한 찰리 카우프만은 논픽션 「난초도둑」의 각색을 맡게된다. 괴짜 난초 수집가 존 라로쉬(크리스 쿠퍼)에 대해 뉴요커 기자 수잔 올리안(메릴 스트립)이 쓴 이 책을 읽고 그는 난관에 봉착한다.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꽃」에 대한 책의 감동과, 이를 불특정 다수가 공감하는 드라마로 만드는 일은 전혀 별개였기 때문. 모니터 커서만 노려보다가 벌써 마감날짜에서 네 달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어댑테이션」은 시작됐다. 몇 올 있지도 않은 머리를 쥐어뜯다가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까지 간 작가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십중팔구 자폭하는 심경으로 썼을 찰리의 「난초도둑」 각색 좌절담은 세상이 「천재」라 부추기는 어느 소심증 작가의 초라하고 동요하는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통했던 길이 이번엔 찰리 카우프만 자신의 머리에 뚫린 셈이다.
 그를 더욱 신경쇠약 직전까지 몰고 가는 것은 할리우드의 영화판. 뚜렷한 기승전결, 확실한 절정과 감동 등 영화 만들기의 규약은 사슬처럼 그를 얽맨다. 특히 유명 작가의 시나리오 10계명을 맹종하면서 장르의 관습을 적당히 섞은 스릴러물을 써서 대박을 터뜨리는 쌍둥이 동생 도널드(니콜라스 케이지)는 찰리의 또 다른 자아. 찰리의 예술가적 갈망에 대한 대척점으로 선명하게 자리잡는 그는 게다가 여자 홀리는 재주마저 탁월해서 찰리의 결핍을 더욱 아프게 파고든다.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들과 찰리의 쌍둥이 동생 도널드처럼 허구의 인물이 얽히는 「어댑테이션」은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 등 다양한 경계를 분주한 교차편집으로 절묘하게 넘나들다가 어느 순간 한 줄기로 모여든다. 찰리가 도널드와 함께 원작자 수잔의 뒤를 쫓게 되면서 섹스와 마약, 자동차 총격전과 비극적 죽음 등 장르적 클리셰들이 총동원된 스릴러액션영화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며 영화 만들기 관습에 문제제기하던 영화의 느닷없는 뒤틀기는 그 생경한 분위기의 반전으로 아연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한편 다소 모호한 결말을 준비한다. 형제간 화해를 거쳐 인격적 성숙을 이룬 찰리가 사랑을 얻게되는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것. 이러한 결말은 「지나치게」 전형적이어서 공고한 관습적 장벽에 대한 비아냥으로 읽히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만들기 관습에 대한 항복선언으로 받아들여질 법도 한 이 방향전환은 찰리 카우프만에게 거는 할리우드의 기대와 열광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존 라로쉬의 행적을 시작점으로 수잔과 찰리의 탐색이 연결되는 일종의 연쇄관계가 깨어지면서 역전된다. 앞선 텍스트의 인물들이 나중 텍스트의 영토에서 새로운 상상적 생명을 부여받는 것. 특히 충격적인 수잔의 「비밀」은 원작인 「난초도둑」중의 한 구절, 즉 「당신을 걷잡을 수 없이 중독시키는 위험한 유혹」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원작에 충실하다. 망가지는 수잔 캐릭터에 대해 실제 수잔이 박장대소한 건 아마 영화가 던졌던 원작과 각색의 관계, 혹은 각색의 영역에 대한 질문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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