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塔)은 범어로 수투파(Sutupa), 즉 ''높은 어른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수투파는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탑파(塔婆)라 하였고 다시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탑(塔)으로 불리웠다.
 탑은 재질에 따라 목탑(木塔), 전탑(塼塔:벽돌탑), 석탑(石塔), 철탑(鐵塔) 등으로 분류된다. 중국은 전탑,일본은 목탑의 문화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석탑의 문화가 주종을 이룬다. 그 단단한 화강암을 깍아 탑을 만드는 솜씨가 남달랐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불교전래 초기에는 경주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목탑이 말해주듯 목탑이 유행하였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재질이 바뀌어 나갔는데 그 중간에 벽돌탑을 모방한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다.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벽돌탑 흉내를 낸 것이다. 재질은 돌이나 형태는 벽돌탑과 비슷하여 ''모전석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전석탑의 대표적인 것은 분황사 석탑이나 일부만 남아 있다. 이외에도 남아있는 모전석탑은 안동 대사동 석탑, 의성 탑리 5층석탑, 경주 용장계 3층석탑, 선산 죽장사지 5층석탑 등이 있는데 이중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보물 제459호)이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존재한다.
 회흑색의 점판암을 켜켜히 쌓은 탑으로 체감율(탑신의 위로 올라가며 줄어드는 비율)이 완만하다. 1층 네모서리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웠고 그 위로 벽돌모양의 돌을 정성스럽게 쌓아 올렸다. 천년 풍파와 잦은 전쟁에도 꿈쩍하지 않고 남아 있는 희귀한 문화재다. 안정된 내림마루와 물매가 합쳐지는 곳의 날카로운 맛은 초창기 그대로이다.
 충청대 박물관에서는 최근 이곳 일대를 발굴조사하였다. 장준식 조사단장은 ''역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석탑이므로 국가 최상급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발굴조사 결과 장락사지는 삼국시대말 부터 조선시대초 까지 법등이 이어져 왔음이 유적·유물을 통해 확인되었다. ''長''자명 출토기와를 비롯하여 여러시대의 기와와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특히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고구려 계열의 와당이 솔찮게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신라기와는 화려하고 백제기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맛을 주는데 비해 고구려 기와는 힘차고 날카로운 맛이 있다. 고구려 기와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져 대체로 적갈색을 띠며 테두리가 두텁다.
 물론 충북지방에서 고구려 기와가 처음 출토된 것은 아니다. 충주 탑평리사지 일대에서도 고구려 계열의 기와가 출토된 바 있으나 제천 장락사지 만큼 개체가 뚜렷하고 여러점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를 통해서 볼때 충주와 제천에 이르는 소백의 언저리가 삼국의 접경지대였음이 다시한번 입증된 셈이다. 땅의 주인은 수도 없이 바뀌었어도 그 지역에서 숙성된 장인(匠人) 정신은 역사의 흐름을 타고 면면히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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