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에서 첫 국제회의는 언제 어디서 열린 것일까. 그곳은 다름아닌 보은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으로 추정된다.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최후를 맞게된다.
 당(唐)의 고종(高宗)은 백제의 땅을 지키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部)를 설치한다. 웅진도독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는 신라에 가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게 황제의 공식적 문서인 조서(詔書)를 전달케 된다.
 같은해 9월 28일, 왕문도와 무열왕 사이에 조서의 전달식은 왕도(王都), 서라벌이 아닌 보은 삼년산성에서 치러졌다. 신라가 이 당시 삼년산성을 국제 정상회의 장소로 삼아 당나라 사신을 맞은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삼년산성의 웅장함을 내비치면서 당으로 하여금 침략의 야욕을 품을 수 없도록 한 일종의 심리전으로 풀이된다. (보은의 성곽, 차용걸)
 왕문도는 동쪽으로 향하여 서고, 무열왕은 서쪽으로 향하여 서서 조서가 전달되었는데 이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조서에 이어 황제가 하사한 물건을 건네받는 사이, 왕문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옆에서 시중들던 사람이 대신하여 전달식을 마쳤으나 왕문도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자비왕(慈悲王) 13년(470)에 쌓고 486년에 다시 수축한 삼년산성은 삼남으로 통하는 삼국의 목구멍으로 고구려의 남하,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며 삼국통일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둘레 1.7km, 성벽너비 12m, 높이 12~18m에 이르는 삼년산성은 성의 내외부를 모두 돌로 쌓고 그 사이를 돌로 채우는 협축(夾築)산성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무정한 인간사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에 대해 공동전선을 구축하며 협력관계를 보인 신라와 백제사이는 신라가 어부지리식으로 한강변의 영토를 차지하자 급속 냉각되었다.
 554년 7월에 있은 관산성(管山城:옥천)전투는 두 나라의 명운을 건 큰 싸움이었다. 처음에는 신라가 밀리다 가야에서 신라로 귀화한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응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뒤바뀌기기 시작했다.
 이때 접경지대를 순찰하며 신라의 전황을 엿보던 백제의 성왕(聖王)은 불행히도 신라의 복병에 잡혀 삼년산성에 주둔하던 김무력의 비장(裨將) 고간(高干:신라외관 3등급 벼슬)도도(都刀)에 의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백제군사는 지휘관급인 좌평 4명과 3만명의 군사가 전사하였으며 태자인 여창만 탈출하여 위덕왕이 된다. 성왕의 딸이 진흥왕의 소비(小妃)로 간 정략 혼사도 말짱 소용이 없는 일이 되었다. 이 전투를 분수령으로 사이가 좋던 신라와 백제는 불구대천지 원수로 번번히 비단강(금강)을 피로 물들였다.
 이로부터 삼년산성의 위상과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단단한 성벽의 축조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저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최대 성인 삼년산성을 잘 가꾸어 예전처럼 ‘컨벤션 센터’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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