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직지’에 대하여 중국보다 먼저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오해가 있었다.
 직지를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박병선 박사에 의해 널리 알려지고, 그것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임이 확인 되었을 때 중국의 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문화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것인데 한국이 그 훌륭한 것을 중국보다 먼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싫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직지보다 400여년 전 즉 961년에 만든 청주의 용두사 철당간 셋째 기둥에는 393자의 양각문자가 있고, 경주 남산에서 발굴한 청동호우(청동 항아리)는 415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장수왕이 만든 것인데 그 밑부분에 11자의 양각문자가 있으니 이는 곧 금속문자가 일찍부터 일반화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직지 이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1200년경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상정예문’등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며, 목판인쇄의 세계 최고(最古)인 ‘무구정광다라니경’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굴된 사실과 중국 북송에서는 고려의 서적을 수입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도 1377년 고려에는 훌륭한 금속문화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는가.
 다음에는 문화발전의 주축이 되는 활자인쇄가 일찍이 한국에 있었으면 왜 서양문명보다 뒤졌었는가라는 의문이다.
 그것은 한국의 특수한 사회환경 때문이었다.
 한국은 책을 파는 문화보다 일부 상류층에서만 나누어 사용하는 문화가 있어서 도서를 대량생산을 안했지만 서양은 독일의 구텐베르그가 성경을 처음 인쇄하여 판매하여 대량 생산을 한 점, 한국은 물질 경시사상이 오랫동안 팽배 하였지만 서양은 물질 우위사상이 팽배한 점, 한국의 화폐가 주화여서 금속기술자의 제품에 대한 제재와 감독이 엄격하였던 점 등이 산업화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게 한 사회환경 때문이었다.
 서양의 대량 성경인쇄는 곧바로 산업화를 이루었고, 대중의 종교 이해 확산은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고, 서적을 통한 대중의 자각은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서양의 발전을 촉진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양은 정신문명 쪽으로 발전하고, 서양은 물질문명 쪽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물질문명은 정신문명에 종속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세계의 선두 주자는 일찍이 금속활자로 직지를 인쇄한 한국의 청주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한다.
 / 문화유산해설사 김 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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