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숨결이 먹물을 따라 송송 배어나는 탁본(拓本)은 고대사를 가장 확실하게 재연하는 실증적 자료다. 서가(書家)에서는 구양순, 왕희지, 안진경, 조지겸, 황산곡 등 명필의 비문을 탁본하여 서예의 교본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서예를 익히는데 이것을 법첩(法帖)이라 한다.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비림(碑林)은 글자 그대로 명필의 비문이 숲을 이룬다. 안진경의 서체의 원조가 되는 ‘안근례비’를 비롯하여 역대 유명한 비문이 사열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일부 비문을 탁본하여 관광객에게 판매하고 있는데 기능공의 솜씨가 너무나 숙달되어 박자까지 척척 맞는다.
 탁본은 비단 글씨에 한정되지 않는다. 탑비(塔碑), 마애불, 돌 공예품, 금속 공예품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탁본을 하는 이유는 우선 대상물을 판독하는데 있다. 세밀한 부분은 육안으로 판독하는 것 보다 탁본을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두번째로는 서예사적인 연구에 있다. 시대에 따라 서예가 어떻게 발달돼 왔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탁본을 통해 찾을 수 있다.
 그 뿐만아니라 탁본은 고대사, 중세가, 미술사를 가늠하는 실증적 수단이다. 서지학(書誌學)과 현장 학습인 금석학(金石學)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것이 탁본의 장점이다.
 탁본에서는 시대별로 유행하던 무늬와 불교사상도 엿보게 된다.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飛天像), 정하마애불의 섬세한 조각과 불심, 삼국시대 각종 와당의 연꽃무늬, 사람얼굴무늬, 귀신눈깔무늬, 풀잎무늬가 한지에 촉촉히 젖어든다. 마치 판화를 보듯 역사의 회오리 바람, 문화의 흥망성쇄가 거기에 찍혀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탁본을 해서는 안된다. 설익은 아마추어 솜씨로서는 탁본도 잘 안될 뿐더러 비문만 망치게 된다. 탁본을 하려면 우선 대상물을 솔 등으로 깨끗히 닥아내고 물로 종이를 밀착시킨후 먹물을 묻힌 먹방망이로 조심스럽게 두드려야 한다.
 이때 종이 사이에 공기를 솔로 두드려 없애야 한다. 탁본대상물체의 파인 부분에는 종이가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도드라져 먹물이 묻어난다.
 개교 20주년을 맞은 충청대가 그동안 벌여온 탁본의 모든 것을 지난 11일부터 15일까지 청주 예술의 전당 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다. 장준식 충청대박물관장의 지도아래 고적조사단 동아리가 전국 각지에서 실시한 희귀 탁본 작품이 감명을 주고 있다.
 국보 제205호인 ‘중원고구려비’를 비롯하여 ‘부여 사택지적비’ ‘무령왕릉지석’ ‘단양신라적성비’ ‘원주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 ‘대불정주비’ ‘화순 운주사석불좌상’ 등 진귀한 탁본 작품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한자리에서 만나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에밀레종의 비천상은 천년의 신비속에 그대로 살아 있으며 ‘철삼선사탑’의 사자상은 금방이라도 부도(浮屠: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무덤)를 박차고 뛰어나와 포효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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