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날개를 펴듯 무심천 하류의 산과 들을 감싸안은 신봉동(新鳳洞), 봉명동(鳳鳴洞)일대에는 아직도 백제가 살아 있다. 중부매일 신문사 앞 명심산(明心山) 자락을 오르내리며 광대한 묘역(墓域)을 조성하고 숱한 토기와 철기문화를 빚어낸 이른 백제는 천 수백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지금도 발굴조사만 하면 그 찬연한 옛날의 색깔을 되짚어 낸다.
 워낙 부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미호천변 일대의 기름진 땅은 마한(馬韓)의 몫이었다. 비단결 금강(錦江)의 상류인 미호천 주변 옥토에서 토기를 빚으며 부족국가 형태를 띠던 청동기 문화의 주체인 마한은 강력한 철기 문화를 가진 이른 백제에게 정복당하고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상당(上黨)이란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무릇 상당이란 ''윗 무리'' 즉 지배계급에 속한다. 4~5세기경 백제 유적인 명심산의 유물출토 상황을 살펴보면 마한과 백제의 문화, 그리고 피지배 계급과 지배계급이 확연히 구분된다.
 산자락 아래로는 토기문화의 주체인 마한이 모습을 드러내고 해발 103m의 능선으로 올라갈수록 무사계급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마한의 토기문화는 연질토기에다 주둥이가 넓고 목이 길다. 이른 백제로 옮아가면서 경질토기로 바뀌고 토기 모양새도 속이 깊은 바리형 토기, 둥근 손잡이가 달린 토기 등 식기전시장을 방불케한다.
 명심산 능선쪽으로 기어오르면 마구류(馬具類), 무구류(武具類)가 많다. 말재갈, 창, 화살촉, 갑옷 등 싸움아비가 쓰던 철제 무기가 나오는데 이중 갑옷과 더불어 지휘자가 사용했던 둥근 고리칼(환두대도·環頭大刀)는 무구류의 백미다.
 이 칼은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달려 있다. 금과 은으로 장식된 그 둥근 고리에는 용과 봉황이 상감기법으로 새겨져 놀고 있다.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은 이 칼은 백제의 통치자가 청주지역으로 진출한 개척자에게 하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이같은 형태의 칼은 명심산에서만 4자루나 출토되었다. 칼과 더불어 출토된 금귀고리, 대롱옥, 굽은 옥 등은 역시 지배자가 군림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일대의 무덤을 보면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다. 일대에서 출토된 무덤은 움무덤(토광묘)이 주종을 이루고 돌방무덤도 더러 나온다.
 남도지방에서 많이 나오는 옹관묘도 출토되었는데 그 규모는 아주 작다. 이는 한데에서 자연적으로 세골장(洗骨葬)을 한후 나중에 뼈만 추스려 다시 옹관에 안치한것 같다.
 명심산의 백제는 산 위 아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천과 까치내의 합수머리에 솟아 있는 월명산(月鳴山)을 돌아 송절동으로 이어진다. 출발점은 명심산이나 종착점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덤떼가 흥덕구 외곽을 한바퀴 돈다.
 그래서 사적 제 319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지만 자나 깨나 도굴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이번 충북대의 발굴조사에서도 또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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