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들의 저녁식사’‘눈물’ 등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임상수감독이 ‘섹스 영화 3부작’의 완결편으로 만든 ‘바람난 가족’은 정작 ‘바람’이 아닌 ‘가족’에 방점이 찍혀있다. 소위 ‘야한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살짝-혹은 상당히-비켜간 것인데, 이에 따르면 호기심을 얄궂게 자극하던 제목과 홍보 카피, 문소리의 벗은 몸 등등은 일종의 미끼가 됐던 셈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제각각 혼외정사에 열중하는 구성원들을 통해 미국 중산층 가정의 붕괴를 서늘하게 고발하던 ‘아이스 스톰’‘아메리칸 뷰티’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관계의 버석거림, 위선적 지식인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홍상수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바람이 들고나는 주씨네 가족 붕괴의 기원을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발굴하려는 의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 모두와 다르다.
 그리고 이 발굴작업은 한국남자로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내의 남편 그리고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존재에 대한 자아비판을 낳는다. 부끄러운 DNA의 소유자들 혹은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주씨네/세상 남자들로 인해 주씨네 가족/세상이 이 지경이 됐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다.
 꽤나 혹독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연민도 자욱한 이 자아비판에 따르면 남자란 참 비루한 존재다. 가장의 의무를 팽개쳤던 영작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은 필시 가부장제 지속을 위해 한국전쟁 당시 여동생 여섯을 두고 남하했던 죄의식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라는 이름의 가부장을 미워하면서 닮아가는 영작은 자신의 몸에 흩뿌려진 아버지의 ‘나쁜 피’의 저주에 걸려 함부로 배설해가며 갈짓자 행보로 휘청거린다.
 그 결과 모든 남자들은 사라져간다. 또 다른 무책임한 가부장, 우편배달부 또한 “어서 빨리 죽으라”는 아내의 악담을 듣다가 영작의 가정을 작살내고는 자살하며, 아무 죄없던 수인마저 주씨네 원죄를 대속하듯 세상을 뜬다.
 반면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각성한 존재가 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와 영작이 후경에, 호정과 시어머니 병한이 전경에 앉아있는 병실장면이 단적으로 상징하듯 영화는 가부장의 대물림이라는 원죄로부터 한 발 비켜 선 존재로 여자들을 그린다. 엄마와 아내, 할머니로서의 삶을 살아낸 병한은 오르가즘의 신천지를 찾아 이 땅을 떠나고, 호정 또한 남편을 아웃시키며 단칸방으로 짐을 옮긴다.
 결국 아버지의 유물인 피아노만 남은 채 텅 비어버린 영작의 집은 한국 가부장의 패배와 가족부재를 비관적으로 선고한다. 주씨네의 사회적 DNA를 물려받은 수인의 처참한 죽음으로 이 불임(不姙)가정에 주어진 단 하나의 희망조차 잔인하게 꺾여버렸으니. 그나마 호정에게는 잉태의 기쁨이 허용됐으나, 이 또한 돈만 아는 천민 자본주의자 아버지의 아들 되기, ‘한국남자’로 사회화되기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도피함으로써 ‘어머니의 아들’로 투항할 고등학생 지운의 DNA일 뿐. 이로써 주씨네에게는 구원이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징글징글한 애증으로 남자들(의 역사)을 해부하는 ‘바람난 가족’은 철저히 남자영화다. 하지만 부메랑처럼 제게로 돌아올 비수를 ‘아버지’에게 던지는 ‘아들’의 도발은 전율을 일으키는 전복의 힘마저 갖지는 못한다. 남자들을 관찰하고 위로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아웃시킴으로써 응징하는 역할을 맡은 여성 캐릭터가 현실의 중력 대신 판타지의 날개를 달고 있는 건 그 이유 중 하나. 그러니 영작의 페이소스를 살렸던 만큼의 노력이 호정에게도 기울여졌다면 허공에 발길질하는 것 같은 헛헛함은 없었으리라는 아쉬움도 거기서 온다. /whereto@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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