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주택의 재래식 난방법인 온돌과 아궁이는 지극히 과학적이며 다목적을 추구한다. 아궁이에서는 장작뿐만이 아니라 솔가지, 삭정이나 생활 쓰레기를 태우면서 밥을 짓고 물을 덥히고 방안을 뜨겁게 했다.
 생활 쓰레기를 불쏘시개 정도로 쓰기때문에 다이옥신 같은 맹독성의 화학물질 발생염려도 없었다. 아궁이는 1차적으로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며 나머지 알불은 화로에 담아 방안을 덥혔다.
 아궁이를 통해 구들장으로 전달된 열은 방안을 달구어 최적의 보온 효과를 발휘했다. 구들장의 열은 아랫목에서 위목으로 전달되며 방안을 골고루 덥게했고 여기서 나오는 복사열은 위로 올라가며 대류현상을 일으켰다.
 문지방 또한 구들에 딱들어 맞는 구조다. 사람이 방안에 누어서 잠을 잘때 코의 높이는 대체로 문지방의 높이와 같다. 그 높이를 경계로 구들의 따듯한 공기와 풍문지를 뚫고 들어온 찬 공기가 만나 감기 등 호흡기 질환을 예방했다.
 구들위의 찬 공기는 화로로 덥혔다. 구들이 보온의 주기구라면 화로는 보조기구에 해당한다. 짤짤 끓는 아랫목은 엄동설한을 충분히 견디게 했고 위목의 화롯불은 긴긴 겨울밤을 따뜻하게 하며 노변정담을 나누게 했다.
 구들은 돌을 달구어 열을 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쉽게 뜨거워지지 않고 또 쉽게 식지 않는다. 아랫목이 미지근할 무렵인 새벽에 군불을 지피면 식었던 구들이 또 달아오른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문화는 입식(立式)이 아니라 좌식(座式)이다.
 안방은 침실이자 거실이요 식당이자 응접실 역할을 해냈다. 하나의 공간으로 여러가지 역할을 소화하는 동시다발적이고 효율적인 생활문화를 숙성시켰던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려(고구려)는 겨울철에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온돌의 모습은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한다.
 구들은 아무래도 추운 지방인 북방에서 발달하여 고구려의 남진과 함께 점차 남쪽으로 전달되었다.
부강의 남성골 산성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구려계의 구들이 발견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중국의 캉촹(年床), 몽골의 게르 바닥은 부분적인 보온 방식이나 온돌의 원리와 흡사한 난방방식이다. 부여족, 고구려 등 북방민족 사이의 난방방식인 구들은 러시아 등지로 퍼져나가며 네모상자 안의 열기구인 ''페치카''로 변형되었다. 이를테면 좌식의 문화와 입식의 문화가 결합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지부 고고학민족학 연구소는 최근 공동으로 연해주 불로치카에서 초기철기시대 마을을 조사한 결과 주거지와 온돌시설, 토기, 석기, 철기 유물을 다수 발굴했다고 한다.
 기원 전후로 하여 형성된 촌락에서 나온 페치가형 온돌과 방고래형 터널을 보면 고구려 건국초기 부터 온돌이 상용화되었고 그 문화가 이웃으로 파급된 것으로 해석된다. 1차적 인간의 욕구는 ''등 따습고 배부른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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