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행간에는 그 시대를 이끌고 가거나 정계에서 은퇴하며 의지를 꺾지않은 일단의 학맥과 선비의 군집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중국의 죽림칠현이나 당송팔대가, 고려말의 두문동(杜門洞) 72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용두사지철당간에 새긴 학원경(學院卿) 학원낭중(學院郎中) 등 지방교육의 책임자급 벼슬은 일찍이 청주가 뿌리깊은 학향임을 말해주고 있다. ''직지심체요절''과 ''신항서원'' 명암동 유적에서 출토된 ''고려먹'' 등도 청주가 학문의 고장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 이어 인물사로 볼때 이른바 낭성팔현이 기호학파(畿湖學派)와 호서사림(湖西士林)을 형성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낭성팔현은 행정지역상 청원 낭성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청주 일대의 사림을 지칭한 것이다. 이 말은 조강(趙綱)의 문집인 모계집(慕溪集)에 실려 있다. (임동철, 낭성팔현과 이유당 이덕수)
 이 문집은 조강의 13세 손인 조철형(趙喆衡)이 조병훈(趙炳薰)과 함께 1904년 4월에 간행한 것이다. 모계집이 언급한 낭성팔현은 박훈(朴薰:1484~1540), 한충(韓忠:1486~1521), 송인수(宋麟壽:1499~1547), 조강(趙綱:1527~1599), 정사호(鄭賜湖:1553~1616), 이득윤(李得胤:1553~1630), 이덕수(李德洙:1577~1645), 홍석기(洪錫箕:1606~1680)를 일컫는다.
 조선 중기에 활동한 이들은 신항서원(莘巷書院)의 전신인 유정서원(有定書院)과 인연을 맺으며 청주사림을 대표해 왔고 청주를 학향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중에서 이유당(怡愉堂) 이덕수는 중심축에 서 있는데 비해 정사호나 홍석기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인물이다. 정사호의 경우는 충북도에서 편찬한 인물지(1987년)에도 전혀 언급이 없다고 임동철 교수는 지적했다.
 이덕수의 한산(韓山) 이씨는 청주에 이주한 시기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지역의 중심가문으로 급부상한다. 이덕수는 높은 학문으로 가문을 끌어올렸다. 또한 명문가와의 혼맥을 통해 기반을 다졌다. 호서사림의 영수로 정계를 주도한 우암 송시열은 이덕수의 동생인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혼인하고 처가인 주성동 수름재에서 이덕수에게 학문을 연마하였다.
 신항서원은 선조 3년(1570) 청주출신 현감 조강이 중심이 되어 이득윤 변경수 등과 함께 유정서원으로 창건하였다가 현종 1년(1660) 사액되면서 신항서원으로 개칭되었다. 신항서원은 청주사림의 세력확장에 어떤 구심점이 되었는데 이덕수의 집안은 이덕수, 이지연, 이수언, 이사찬 등 4명이 원장을 지냈다.
 조선후기의 호서사림은 기호학파의 원조인 이이(李珥)를 계승한 김장생으로부터 형성하여 우암 송시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청주의 학맥은 변두리에만 있던게 아니라 한동안 중앙 정계를 주도할만한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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