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산성에 가을이 내린다. 단풍으로 곱게 물든 오정산(烏頂山)과 그 산을 에워싼 삼년산성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들고 있다. 무려 1천5백여번의 가을을 되풀이 하며 삼국통일의 역사를 갈무리해 온 산성이다. 태종 무열왕과 장수 고간 도도(高干 都刀)의 고함도, 성벽에 서린 백제 성왕(聖王)의 원혼도 바람 속에 묻힐 뿐이다.
 우리는 한동안 바람이 전하는 역사의 소리를 외면했다. 개발지상주의에 급급한 나머지 그 오랜 선조의 숨결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옛 성은 비 바람에 씻기고 닳아 제 얼굴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제터를 지키며 역사의 여울을 어렵사리 건너왔건만 정작 세인들은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무심히 바라다볼 뿐이었다.
 보은읍 어암리 일대에 있는 사적 제235호 삼년산성이 역사의 미로를 헤메다 이제사 주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제1회 삼년산성문화제가 드디어 열린 것이다. 허구헌날 속리산에다 목줄을 대던 군민들이 삼년산성으로 눈을 돌렸다.
 삼년산성의 자리매김을 위한 학술대회를 비롯하여 군민서바이벌대회, 삼년산성 걷기대회와 보물찾기, 퀴즈게임, 서바이벌 사격대회 등 조촐한 잔치를 마련했다. 이 축제는 삼년산성의 가치를 이해하는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서 의의가 크다.
 중국의 학자도, 일본의 학자도 이곳을 탐방하여 높이 13~20m에 이르는 웅장한 성벽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으나 정작 내고장에서는 그렇게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단순히 높이로만 따지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능가한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지난 1994년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삼년산성을 잠정목록에 넣었었다. 결과적으로 서쪽 성벽의 복원이 문제가 되어 탈락하고 말았다. 차라리 허물어진 채로 그냥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괜시리 보수를 한답시고 손을 대어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다.
 삼년산성을 가장 먼저 조사한 성주탁 충남대명예교수는 ''성형수술을 너무 많이 해서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지적했다. 돈은 돈대로 들고 문화재는 문화재대로 엉망이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한번 탈락하면 영 물건너 간 것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탈락후 3~5년 정도 지나면 다시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어거지 복원을 한 서쪽 성벽을 그냥 둔채로는 후보에 올릴 수 없다. 여기에 대해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허권 문화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삼년산성은 최근에 변조된 고구려 고분벽화와 같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성벽을 그렇게 보수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정성(authenticity)을 확보해야 합니다. 보수하기 이전 옛 날에 찍어둔 사진이 있으면 좋구요, 아니면 잘못 복원된 부분을 헐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재는 복원보다 보존이 훨씬 중요하다. 서양에서는 복원이라는 말조차 쓰기를 꺼린다. 문화재의 타일 하나조차도 바꾸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걸핏하면 복원이다. 결국 삼년산성의 행로는 섣부른 복원보다 그냥 두는게 낫다는 해답을 얻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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