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의 사각지대인 증평이 1읍 1면이라는 초미니 지방자치단체로 탄생했다. 이에따라 초대군수와 군의원을 뽑고 역사적 출항을 하게 된 것이다.
 증평이 괴산군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것은 기형적 행정조직에서 기인된 것이나 이같은 표면적 이유이외에도 괴산과 증평은 지리적,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데 또하나의 원인(遠因)이 존재하고 있다.
 지역의 구분은 행정적인 분류이외에도 자연적인 조건이 한 몫을 거든다. 가령, 큰 강과 산, 고개가 있으면 문화권, 생활권이 달라지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산맥과 강을 경계로 하여 사람들의 정서, 말씨, 관습이 다른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증평과 괴산을 잇는 해발 228m의 모래재는 두 지역 문화권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다. 즉 모래재 안쪽인 증평 일대는 금강문화권이고 모래재를 넘어선 괴산은 한강문화권에 속한다. 증평의 보강천은 금강의 지류이고 괴산의 괴강은 달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든다.
 두 지역은 역사적 맥락도 약간 다르다. 고려시대 괴산은 충주목의 속군이었으며 청천(靑川), 청당(淸唐), 청안현(淸安縣)은 청주목에 속했다. 참고적으로 고려시대 청주목의 관할지역을 보면 2군, 7현에 달했다.
 2군은 연산군(燕山郡:문의)과 목주(木州:목천)이며 7현은 진주(鎭州:진천), 전의(全義), 청천(淸川,靑川), 도안(道安), 청당(靑塘,淸唐:청안), 연기(燕岐), 회인(懷仁)현을 일컫는다. 당시의 관할 군현은 행정적인 분류에 그친 정도일뿐 실제로 군현은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청천의 경우는 청주목의 속현으로 현감을 별도로 두지 않았다. 도안현은 고구려시대 도서현(道西縣)으로 신라 경덕왕때 도서로 고쳐 흑양군(黑壤郡:진천)의 영현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도안은 역사의 부침에 따라 진천, 청주, 괴산을 거쳐 현재의 증평군에 이르고 있다.
 청당현은 본래 청연현(靑淵懸)으로 고려초 청당현으로 고치고 청주에 내속되었다. 뒤에 감무를 두어 도안현을 겸임하였다. 모래재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의 골이 깊어진 것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시키면서 부터다.
 오랫동안 청주 문화권에 있던 청안, 도안이 괴산으로 편입된 것이다. 생활권은 오히려 청주나 진천에 가까운데 행정은 괴산에 속해있었다. 두 지역이 모래재를 경계로 정서를 달리한 것은 바로 이같은 문화의 충돌 현상에서 근본적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장뜰이라고 부른 증평은 충북선 개통이후 급격히 세가 불면서 인구로 볼때 군소재지인 괴산읍을 앞지르게 되었다. 시 규모은 안되고 읍 규모는 넘어서 12년을 충북도에서 직접 관할하는 증평출장소 형태로 운영되다 이번에 독자적 지자체인 증평군을 탄생시킨 것이다.
 모래재는 내륙의 작은 고개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한강문화권과 금강문화권의 분수령 역할을 해오며 문화의 충돌과 융합현상을 되풀이한 역사의 점이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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