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산맥과 차령산맥의 여맥(餘脈)이 바다를 향해 달리다 한 숨을 돌리던 곳에 갈비살같은 기름진 땅이 인류문화의 터전을 일구었으니 다름아닌 미호천변의 충적평야다.
 실오라기같은 비단물결이 줄기를 모아 금강(錦江)의 지류를 이룬 곳에는 일찍이 인류의 지문이 찍혀 있다. 깊지않은 냇물은 고기잡이에 제격이었으며 드넓은 평야는 바로 삶의 터전이었다.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쌍코뿔이, 동굴곰, 사슴뼈 치레걸이(목걸이) 등 50만년전 사람의 흔적이 있고 4만년전 인골인 ‘흥수 아이’는 충청인의 조상이 된다.
 봉명동의 수많은 집터는 첫번째의 청주 시민이 거주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신봉동, 송절동의 원삼국 문화와 이른백제 고분은 마한(馬韓)의 실체와 초기 철기문화를 대변해 준다.
 오송, 오창 과학단지가 들어서고 경부고속철 오송역이 설치되는 미호평야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석기 시대의 지층인 홍적토와 그 이후 퇴적층인 충적토가 폭넓게 발달돼 있는 이 일대에는 지층을 따라 선사, 역사문화가 명멸하였다.
 강외면 쌍청리에서는 보기 드물게 신석기 시대의 집터가 나온바 있다. 단편적인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는 흔히 발견되고 있으나 집터가 출토된 예는 흔치 않다. 이 집터에서는 갈판과 더불어 토기 주둥이 부분에 집중적으로 여러 형태의 무늬가 새겨진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가 나왔다.
 궁평리 유적은 고속전철 공사와 인연이 깊다. 지난 1993년, 경부고속전철 교각 공사를 하다 단면에서 나온 불먹은 토양과 숯이 단서가 되어 충북대선사문화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가마터 3기와 집터가 출토되었다.
 발굴된 3기의 가마터는 모두 한데(야외)가마로 평지에 구덩을 파고 토기를 구워내던 초보적 단계의 가마터로 해석된다. 집터는 타원형의 얕은 구덩을 가지는 둥근 꼴로 이른바 ‘송국리형 집터’에 속한다.(이융조, 청주지역 선사문화)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경부고속전철 건설예정지에 대한 전면 재조사가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충북선이 개통하자 오송역은 청주 서부지역 일대의 기차 통학생 거점역이 되었다. 공북, 만수, 호계, 쌍청, 궁평 일대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집결하여 미호~정봉~서청주를 거쳐 청주로 통학하였다.
 기차의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동작빠른 학생들은 고갯마루에서 잽싸게 기차를 타고 내리기 일쑤였다. 종례시간에 단체 기합을 받다가 기차시간이 되면 하는 수 없이 ‘기통생’을 먼저 보내주는 해프닝도 연출되었다.
 충북선의 기적소리는 근대사의 여명을 헤치는 어떤 신호음이였다. 그 기찻길과 열십자로 교차하는 경부고속전철이 충북을 통과하며 오송역을 유치하게 되었으니 충북의 새 역사는 아무래도 오송벌에서 시작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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