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은 순수한 우리말로 ‘잣’ ‘재’ ‘성재’ 등으로 불린다. 이 말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잣미’ ‘잠미’등으로 불리다가 한자와 결합하여 ‘장미’(薔薇·長尾)로 굳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충북에서는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에 있는 장미산성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비록 한자식 표현은 장미(薔薇)이나 꽃중의 왕인 로즈(ROSE)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장미산성으로 가는 길목엔 만추를 아쉬워 하는 듯 행락인파, 관광인파가 충주호 조정지 댐, 수변 관광지구를 가득 메우고 있다.
 한반도의 중앙을 의미한다는 탑평리 칠층석탑과 충주호의 푸른 물빛, 그리고 현대 조각품이 자연스럽게 어루러진 역사, 휴식공간이다. 조정지 댐에는 수천마리의 물오리가 한가롭게 헤엄을 친다.
 그 조정지 댐을 지나 왼편에는 국보 제 205호인 ‘중원 고구려비’가 있고 오른편에는 사적 제 400호인 장미산성이 산 정수리와 계곡을 에워싸고 있다. 봉학사(鳳鶴寺)까지 차량운행이 가능하나 4륜구동이 아닌 보통 승용차로는 이곳까지 오르기가 힘들다.
 해발 337.5m의 산을 둘러싼 장미산성은 길이가 2천9백40m, 높이 5m, 폭 5~10m에 달할 정도로 성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이 성은 삼국의 역학관계를 품고있는 비밀의 성이다.
 성 안쪽으로는 초기 백제의 토축 흔적이 보인다. 백제가 금강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한 한강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증거다. 이 토축은 한성백제의 몽촌토성과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판축된 부분에서는 백제의 전형적인 토기인 회청색 조족문(鳥足文:새발무늬)토기도 보인다. 그러나 판축된 바깥부분으로는 고구려 계열의 석축성이 남아있다. 초기에는 백제성이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가 빼앗아 남진의 요새로 삼으며 중원 일대를 경영한 전초기지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장미산성은 신라산성의 계열과 달리 대부분 기단을 두지않고 지면 혹은 석반을 다듬은 위에 성벽을 쌓았고 아랫쪽에서 위로 오르는 하부에 약간씩 들여쌓기를 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성벽 일대에서 고구려의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단기간 경영하고 물러난 것일까.
 백제계열의 조족문 토기는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 출토 토기와 같은 양상이다. 백제의 유적·유물은 금강변으로 부터 충주를 거쳐 태백문화권인 영월, 정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발견된다.
 성안에는 봉학사라는 절이 있는데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산신령 대신 드물게 ‘노고(老姑)할미’를 모시고 있다. 노고할미는 산성의 축조와 연관이 깊은 전설상의 인물이다. 한복차림의 노고할미와 동자상이 이채롭다.
 현재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책임조사원·차용걸)에서는 성과 백제 가마터를 발굴조사하고 있다. 남한강변, 삼국의 역학관계가 여기서 밝혀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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