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원은 얼마인가?

[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2022-08-04     중부매일

"오십 원만 빌려주시겠어요?" 동네 편의점 데크의 의자에 앉아 메로나 하나 사먹고 있는데 육십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쭈삣쭈삣 다가오더니 말했다. 진짜 오랫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천원짜리 지폐가 있다면 이유 불문하고 한 장 정도 드리고 싶은데 지갑에 5만원 지폐 한 장과 카드밖에 없는 나는 방법이 없었다. 십년 정도 전이라면 편의점에 들어가 간단한 뭐라도 5만원 지폐를 내고 사서 거스름돈 받아 일이천 원도 드리고 혹 빵, 우유도 사서 덤으로?드렸을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에 대해 알면서도 모른척 속아주는 정서도 내가 약해졌나보다. "없어요". 그 말로 대신했다. 행색이 궁핍해 보이진 않았다. 옷도 괜찮은 편이고 눈빛도 살아 있었다. 이 사소한 해프닝은 나를 짧은 멍때림 후에 야릇한 곳으로 불쑥 이끌었다.

우선 빌려달라는 말은 달라는 말에서 영악하게 진화된 말이다. 빌려달라는 말에 구걸, 거짓말, 속임수가 포함됨으로써 그 말은 진짜 빌려달라는 것, 가짜로 빌려달라는 것으로 분화된다.

세상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누군가 뭔가를 빌려달라고 할 때 잠깐의 먹먹한 불편함이 거의 무시되는 분위기로 우리 사회의 정서가 변했다. 게다가 오십원만 빌려주세요, 이 말은 거의 사어의 속성을 띄고 있으면서도 사회의 깊은 곳을 건드리고 사람들이 망각의 단계에 이른듯한 곳을 푹 찌르는 느낌이 있다.

오십원. 그 말은 아주 잘 계산된 말일 개연성이 크다. 그리운 시절의 어느 정서로 훅 끌고 간다. 듣는 사람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들게 한다. 대개 오십원 짜리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백 원짜리 동전도 거의 들고 다니지 않으며 오백원 짜리 동전도 점점 그러한 추세이다. 선심이 다소 몽롱한 가운데 일어나는 사람이라면 천원을 주는 게 거의 상식일 것이다 "천 원만 빌려주세요" 이렇게 말했다면 천원을 받는 확률이 지금 시대에선 몇 프로쯤 될까? 5 프로? 3 프로? 제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꾸며 공개적인 질문을 한다면 이 시대의 풍속도가 나올지 모른다. "오십 원만 빌려주세요" 이렇게 말할 경우 천 원 받을 확률이 거의 두 세배 높아질 것 같다. 그만큼 영악한 말이다. 천원 정도를 기대한 상태에서 상대의 마음을 순간 무장 해제시키며 묘하게 마비시킴으로써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십원은 미끼이다. 그 미끼를 이용해 천원 정도를 공짜로 얻으려는 것이다. 그 영악한 말이 천박 자본주의 정글인 우리나라에서 조금은 통한다 함은 순수, 인정 같은 가치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오십 원만 빌려달라는 사람의 뇌 안에 든 오십 원은 얼마이며 선뜻 천 원을 내 주는 사람의 가슴에서 해석된 오십 원은 얼마인가?

이명훈 소설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삶이 망가지고 피폐한 상태에서 생존 본능에 대한 지혜 정도만이 남아 저 말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저렇게 구걸하며 떠돌게 하면 안된다. 정부에서 사회안정망을 확장시켜 그 범주 안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야 한다. 확률도 희박한 천 원 정도에 삶을 저당잡히게 하지 않고 월 단위로 적정 금액을 무상으로 지급해야 한다.

그냥 속임수에 익숙하고 남의 주머니 터는 중독에 빠져 사는 사람인 경우도 저 말을 쓸 수 있다. 이 몇가지만 보더라도 저 문장은 해석의 놀라운 다양성 안에 놓여 있다. 인간적인 내음이 소멸된듯한 사회에서 저 말은 좀 과장한다면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 같은 느낌도 슬쩍 든다. 그만큼 문학이나 예술로 승화될 씨앗이라는 말도 된다. 오십 원은 얼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