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강내면 태성리가 고향인 조남기 중국 정협 부주석의 방한과 고향방문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갖는다.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남북의 교류가 잦아지는 시점에서 조선족 출신으로 드물게 중국 고위직에 오른 그의 행보와 영향력이 남북의 매듭풀기에 적잖은 변수로 작용할 공산이 크기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 1시간이나 조 부주석과 환담을 나눈 것을 보면 중국내 그의 정치적 입지와 앞으로 남북 교류에 미칠 영향력을 넉넉히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여야 정치지도자들을 만난 그는 62년만에 고향인 청원 태성리를찾아 선영에 참배하고 마을 주민들과도 회포를 풀었다. 나무를 해다가 조치원 장터에 팔던 소년 조남기가 고희를 넘겨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조동식은 3.1운동 당시 청주·청원 지방에서 횃불시위를주도한 인물이다. 조동식은 마을주민 수십명과 함께 뒷산인 고무레봉에 올라 대한독립의 횃불을 밝혔다.

이 횃불시위는 도내는 물론 충남으로, 경기도 일원으로 전파되며 3.1운동의 한 전형으로 번진 것이다.

조동식은 이로인해 2년형을 선고받았고출옥후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망명했다.

이때 12살의 소년 조남기는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 나섰다.

길림중 졸업, 팔로군 입대, 동북군정대학 졸업, 한국전 참전, 문화혁명당시 유배, 중국군 최고 계급인 상장진급, 부총리급인 정협 부주석 취임 등 그의 인생 역정은 마치 파란만장했던 동북아의 근대사를 보는듯 하다.

사실 지난 80년대 까지만 해도 그의 중국내 정치적 군사적 위치가 아름 아름 알려졌으나 중국과 수교전인데다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 남북한 교류의 교착상태 등으로 인해 겉으로 드러내고 말하기를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여겼다.

한·중 수교후 그러한 걸림돌은 제거되었으나 남·북과 모두 수교하고 있는 중국측의 시각에선 그의 방한을 서둘러 주선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남·북 해빙무드와 함께 방한한 조 부주석은 고향 방문길에서도 퍽이나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원종 지사를 비롯 각급기관장과의 환담, 청주대에서의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충청대에서 명예 교수 추대, 경부 고속전철 시승 등 눈 코 뜰새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일정속에서도 이원종 지사로 부터 오송보건의료과학단지내 중국 한의학 관련 기업체및 연구시설의 투자를 건의받고 이의 유치를 약속한 것은조 부주석의 고향 방문길에서 일궈낸 가장 값진 수확으로 평가된다.

때마침 충북은 오송단지를 세계 생명과학의 메카로 육성하려는 꿈을 펼치고 있고 조 부주석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3.9제약회사를 설립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양측의 이러한 입장이 시의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격동의 근대사속에서 고향을 찾는데 무려 62년이 걸렸으니 이 모든게역사의 아픔이다. 지난날의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며 21세기의 동반자이길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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