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겠다"
구국 일념 의병활동 전국에 횃불로 번져

꿈이 많고 열정 가득한 사람들은 밤낮없이 뒤척인다. 낯선 발자국에도 귀를 기울이고 바람이 옷깃을 스치기만 해도 화들짝 놀란다. 나는 왜 광야에 홀로 서 있는가. 나는 이 광야에서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가슴이 뛴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더욱 간절하다. 세종대왕의 창조력과 애민정신, 이순신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정기를 받지 않았던가.

봄의 정원에 들어섰다. 이랑져 흐르는 푸른 물결, 굴절하는 빛의 눈부심, 볼에 와 닿는 상큼한 바람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유목민들이 평원을 즐기며 홀로의 자유를 찾고자 했던 것도 자연의 위대함 때문이 아닐까. 화랑정신은 두뇌의 잣대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슴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야 하고, 그 무위한 아름다움이 거친 내 삶을 매만져 주어야 한다. 길 위에 서면 어디로 가야할지 분명해 진다. 그래서 오늘도 길을 나선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시내 한가운데 아사봉(현 중앙공원)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 또한 빛났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갔다. 이렇게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이전에 본 일이 없었다. 벽 하나, 기둥 하나, 된장 항아리 하나 남지 않았다. 이제 제천은 지도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영국 데일리 메일의 멕킨지 기자>
 

1907년 8월, 일제는 제천 의병을 폭도(暴徒)로 규정하고 무차별한 학살을 자행했다. 주민들이 의병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해 영국 데일리 메일의 멕킨지 기자는 제천시내의 처참한 풍경을 국제사회에 고발했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은 이 지역 의병들의 용맹한 활동과 무관치 않다. 청일전쟁 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개화를 빙자해 단발까지 강요했으니 민심이 요동쳤다.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것이 좋겠다며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제천의 장담마을에 모여 공부하던 선비들이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직면했음을 알고 의병항쟁의 길에 나선 것도 이 때부터다.

류인석을 중심으로 봉기한 제천의병은 전국 의병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성격도 분명하다. 훗날에까지 미친 영향이 컸다. 류인석은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국모를 시해한 일제와의 외교는 국가의 수치입니다. 우리 스스로 힘을 기르지 않은 상태에서 개화를 할 경우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자주, 자강, 자생의 역량을 결집해야 합니다.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이 어떻게 외세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친일적인 개화파를 처단해야 합니다."

류인석은 함께 공부하던 선비들과 제천의 청년들을 불러 모은 뒤 장담마을에 첫 근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일제가 점령하고 있는 충주성으로 달려갔다. 박달재를 넘어 충주성의 북쪽을 들이치고, 별동부대는 청풍을 거쳐 그 측면을 공격했다. 그 결과 1896년 2월 17일 충주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며칠 후에는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할 수 있었다.

이후 제천의병은 충남과 영남으로 달려갔다. 일본군의 병참을 공격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아관파천 이후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천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군과의 치열한 교전을 강행했다. 이들의 봉기는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이 지역의 의병혼이 살아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류인석에 이어 이강년의 부대는 충북·경북·강원도를 잇는 백두대간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나들면서 적을 기습하고 빠지는 형태의 유격전을 펼쳤다.

싸움은 질기고 위태로웠다. 무기도 없고 식량도 없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으니 그 아픔과 상처를 말해 무엇하랴.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세는 갈수록 커졌고 온 나라가 피와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졌다. 그렇지만 제천의병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죽기를 각오했기 때문이다. 

류인석을 비롯한 일부 의병은 서간도로 망명했다. 낯선 땅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13도의군(道義軍) 결성에 참여하고 의병활동 뿐만 아니라 계몽운동 등 포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상설과 함께 광무황제의 블라디보스토크 파천까지 구상했다. 나라 안팎에서 구국의 일념만으로 온 몸을 다해 싸웠던 것이다.

격동기에는 실리만을 쫓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제천의 사람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충정으로 가득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니 그 기상을 가슴에 새길 일이다. 위기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지 엄연해졌다. 글·사진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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