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천 시인 향년 61세로 별세...병고 끝에 작품 남겨
교사 재직 중 분단시대 동인 활동.교육 개혁에도 앞장
퇴직 후 10년간 연락두절...다시 찾은 지인에 원고 건네

故 김시천 시인
故 김시천 시인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금년 우리 집 풍등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마침내 아쉬운 작별의 손을 떠날 때 /바람처럼 가벼워져 / 나의 눈빛으로만 하늘로 올라 /거기 순결하게 빛나는 별이 되면 좋겠구나 / 그래서 네가 다시 부르면 돌아와 별똥별 되면 좋겠구나/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립문자 연꽃 얘기는/ 이제 그만해도 되겠구나 / 처음부터 우리 마음에 다 있었으니까 / 없어도 괜찮았으니까 / 피 철철 흐르는 입설단비도, 다 / 부질없는 짓이었으니까 <'풍등' 中 -김시천>

지난 4월 7일 10여 년 동안 소식을 알 수 없었던 한 시인의 속절없는 부음을 접한 지인들은 충격 속에서 울음을 삼켜야 했다.

김시천(본명 영호) 시인. 그는 향년 61세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며 1987년 분단시대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해직교사 신작시집 '몸은 비록 떠나지만'(실천문학사)과 1990년 그의 첫 자유 버섯인 시집 '청풍에 살던 나무'(제3문학사)를 발간했다. 이후 1993년 '지금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것이'(온누리), 1998년 '마침내 그리운 하늘에 별이 될 때까지'(문학동네) 등의 시집을 남겼다.

이후 2003년 시선집 '시에게 길을 물었네'(문학마을)와 시집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내일을 여는 책)를 냈다. 김 시인은 몇 년 전부터 병마와과 싸우면서도 2012년까지 쓴 시와 2018년 작인 심재, 소요유, 눈 내려 좋은 날 등 3편을 수록한 자신의 마지막 시집 '풍등'(도서출판 고두미)을 출간했다. 

그의 시집 '풍등'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운신조차 힘든 그를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지인에게, 자신이 세상 떠나는 날 장례식은 없으나 친구들과 인사는 나누어야 하니 시집을 마지막 선물로 마련해 달라는 부탁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김 시인은 남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장례식 없이 시신은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유가족과 그가 몸담았던 예술계(민예총) 교육계(전교조) 지인들은 그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청주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던 시인의 영결식은 고인에 걸맞게 마음을 다해 준비한 아름답고 조촐하고 특별한 자리가 됐다.

그렇다면 시인으로서의 김시천, 교사로서의 김시천은 어땠을까?

충북대학교 75학번이었던 그는 고교시절 입시지옥 속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나 이육사 시인의 '광야' 같은 시를 읽고 유일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아, 나도 시인이 되면 좋겠다. 그런 시를 쓰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하자 문학 동아리인 '창' 문학회에 가입했다. 

당시 문학회 활동을 같이 했던 후배들은 김시천 시인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 선배는 말이 고도로 정제돼 있는 사람이었어요. 말 자체가 한마디로 '시'였죠.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어요. 음악적 소양이 뛰어나 대금, 소금, 색소폰 등 여러 악기들을 다루었고 작곡도 했지요."

김시천 시인의 지인은 김 시인에 대해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사람'이고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랬기에 교사로서의 그는 교육계의 모순된 현실에 눈감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교육운동의 주체로 적극 참여해 마침내 해직되고 주로 문화분과에서 활동하면서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맡는 등 교육 개혁에도 앞장섰다.

그에게 배운 학생들은 그를 '자상하고 어머니 같은 선생님'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수업의 이론보다는 사람의 심성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전해주려 노력했던 선생님. 또 교사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동료, 그것이 교사로서의 김시천이었다.

그리고 문학의 길을 가려는 후배들에게는 '내 삶의 결을 따라가며 물 흐르듯이 써내려 가는 것이 바로 시이며 문학'이라고 가르쳐주는 그는 결국 문학이란 우리의 삶 그 한가운데 치열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 순간의 마음들을 느끼고 자기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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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가 퇴직 이후 지인들과 10년 이상 연락을 끊었다. 그를 잊지 못한 한 지인이 행방을 찾았으나 시인은 이미 병이 깊었다. 시인은 그동안 모아뒀던 원고를 넘겼다. 지인이 받아든 원고는 시집이 됐다. 서로를 알아주는 이들과 함께 함의 기쁨으로 시집 '풍등'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바람대로 이승의 친구들에게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이 됐다.

타고난 시인인 그는 우주를 떠도는 무수한 시의 은빛 비늘의 반짝임에 잠들 수 없는 싱그럽고 푸른 영혼, 슬프고 처절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다. '풍등' 발간 뒤, 이제 다시는 시심이 솟지 않을 것 같다며 절필을 선언한 시인이었지만 생의 마지막 병고 속에서도 손가락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시를 썼고 그것을 매일 지인에게 꽃잎처럼 띄워 보냈다. 고인의 표현에 의하면 '온 세상 눈 내려 외로운데 담담히 창문을 두드려' 시인을 찾아낸 지인과 함께 매일 치열하게 시를 논하고 손가락 힘이 다할 때까지의 마지막 투혼의 결과물이 된 20여 편이 넘는 찬란한 영혼의 시편들을 남겼다. 

어떤 말로도 그를 설명한다는 것이 부족하고 부질없는 일임을 절감하며 고인의 영전에 바친 시인 송찬호의 추도시 한 부분으로 명복을 빌 따름이다.

꽃 진다 하여, / 숨이 차가워지고 / 몸이 산산히 부서진다하여 / 흔적 없이 그냥 떠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 꽃진 자리에 시가 남고 / 가르침의 자리엔 아이들의 노래가 남고 / 저렇게 하늘 높이 풍등은 떠오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 다시 말하노니 / 시인은 가도 / 노래는 남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 시인이시여 / 꽃시천이시여 / 저녁의 어둠을 가르고 / 붉은 숨으로 다시 높이 오르소서 / 잘 가소서, 바람의 날개위에, 해와 달의 어깨 위에, 높이높이 떠오르소서 / '떠오르는 풍등을 위하여' - 김시천 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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