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사정 계곡

모내기가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계곡으로 갔다. 돌무덤을 파헤치며 가재를 잡았다. 미리 준비해 둔 마늘잎과 고추장을 풀어 가재찌게를 만들었다. 솔잎으로 불쏘시개를 만든 뒤 불씨가 어느 정도 살아났다 싶으면 나뭇가지를 꺾어 큰 불을 만들었다. 다 찌그러진 냄비에는 어느덧 붉은 가재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가재는 큰 집게다리와 네 쌍의 작은 집게다리가 있는데 집게다리에 손가락이 물려 붉은 피를 뚝뚝 흘리던 녀석도 있었다. 암컷과 수컷의 생김새가 비슷해 쉽게 구별이 안 되지만 눈썰미 좋은 아이들은 금방 알아챈다. 가재끼리 싸움을 걸어보았을 때 화를 내지 않으면 암컷이고, 집게다리를 쳐들고 달려들면 수컷인 것이다.

숲속과 냇가와 계곡을 햇살처럼 바람처럼 뛰어다니고, 들판의 알알이 여문 곡식과 산중 열매를 바람처럼 톡 따먹었다. 더위를 피해 등목과 탁족을 즐기고, 미루나무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배꼽바람을 즐기던 시절이 그립다. 그리워하고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라 했는데, 오늘따라 옛 생각에 젖어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래서 만화방창 오월에 길을 나섰다.

탁사정 계곡

제천은 숲과 계곡의 마을이다. 그 사이로 물길이 있고 호수가 있다. 마을은 낮고 느리다. 그들의 삶 또한 애달프지만 자연을 닮았다. 그래서 제천 사람들의 마음은 산처럼 크다. 계곡처럼 주름져 있다. 호수에 빛나는 햇살처럼 여백의 미가 있다.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탁사정(濯斯亭)이 있다. 중국 초나라 때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청사탁영(淸斯濯瓔) 독사탁족(獨斯濯足)'의 글귀에서 따 온 것이다. 맑은 물에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 발을 씻는다는 뜻이다. 구학산과 감악산 사이에 위치한 뾰족 바위산에 위치해 있는데 가뭄이 들면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던 곳이다. 그 아래로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龍沼)가 있고 붉은 소나무와 큰 바위 풍경이 일품이다.

이곳에 왜 정자가 있는 것일까. 이 땅의 모든 정자는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해 있다. 기암괴석과 푸른 소나무, 쏟아지는 햇살과 마르지 않는 물길, 바람도 가던 길 멈추는 바로 그 자리에 정자가 있다. 한국의 정자는 자연이 병풍이다. 사방이 한 폭의 그림이고 풍경화다. 옛 선비들은 매화꽃이 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매화꽃을 찾아 산으로 계곡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 곳에 정자를 세웠다. 봄 여름 가을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책을 읽고 시를 읊었으며 선비의 기개를 품었다.

맑은 물에 몸을 씻는다는 뜻을 다은 탁사정

제천에는 한수면 송계리의 송계계곡, 덕산면 월악리의 용하구곡, 백운면 덕동리의 덕동계곡 등 여러 개의 계곡이 있다. 계곡 속으로 들어가면 옛 생각에 젖고, 맑은 풍경과 물맛에 젖고, 사랑에 젖는 법이다. 월악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송계계곡은 한 여름에도 계곡물이 어름처럼 차가워 피서객들로 넘쳐난다. 너럭바위나 떡바위라고 부르는 공룡같은 바위들이 즐비하고 송계팔경과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 등 때 묻지 않는 자연이 좋다.

용하구곡 역시 천연림과 맑은 물과 바위가 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봄에는 진달래 철쭉의 꽃 천지고, 여름에는 시원함이 뼛속까지 스미며, 가을엔 단풍으로 물들어 신선이 된 듯하며, 겨울에는 북풍한설에 산과 계곡 모두 고요하니 고립무원 천의무봉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정감 넘치는 시골풍경을 즐기다 보면 덕동계곡을 만나게 되는데 맑은 계곡에 몸과 마음을 맡겨보자. 올 여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것이다.

시인 박용하는 '연하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무래도 시가 좋겠어, 바람이라면 더 좋고, 나무와 길이라면. 아무래도 노래가 좋겠어, 누가 꼭 듣지 않아도, 빗방울이라면 좋고, 진눈깨비라면 더 좋은. 아무래도 사람이 좋겠어, 저 나무아래 걸어, 이 길로 드는, 하늘이라면 더 좋고, 염소라면, 제비꽃이라면. 좋은 것은 아무래도 자연이 제일 좋겠어." 그래, 나도 자연이라면 좋겠다. 계곡의 물길이라면 좋겠다. 사랑이라면 더욱 좋겠다. 글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탁사정 입구에 조성된 솟대

# 그동안 '이야기가 있는 충북 100경'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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