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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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보나 지식 등 마음의 양식이 참 풍부하다. 디지털 혁명, 4차 산업혁명에 따라 양식의 증가를 부정할 수 없다. 없었던 양식이 탄생한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신이 없다. 선현의 이론과 주장이 실행, 논의되고 고전이 당당히 존재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양식의 풍부함은 양보다 접근이 보다 용이함을 의미하지 않을까? 디지털 혁명 이전에는 지식이나 정보 습득이 지금보다 무척 번거롭고 어려웠다.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했다. 시간을 내 교양이나 전문서적을 읽어야 했다. 아니면 돈을 주고 직접 전문가로부터 배우거나 사숙(私淑)을 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누구에든 물어야 했다.

이젠 그럴 필요 없다. 주변에 널려 풍요로운 게 지식과 정보다. 한 마디로 지천(至賤)이다. 굳이 독서를 하지 않아도 된다. 두꺼운 백과사전을 찾을 필요도 없다. 선생님, 전문가로부터 번거롭게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지식인이었지만 본래 배우기를 좋아해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敏而好學 不恥下問)'는 공자(孔子)의 말씀이 무색해졌다.

디지털 혁명 때문이다. 질문 대신 검색이란 단어가 판친다. 인터넷 검색 창에서 자판을 치면 기계가 답을 알려 준다. 말이 필요 없다. 순식간에 원하는 정보나 지식을 얻는다. 진위에 대해서는 나중 일이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에 얻은 재료를 거침없이 믿는다. 특히 스마트폰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지식과 정보를 꺼내 사용할 수 있다. 어떤 정보나 지식 추구에 시공간적 구애를 받지 않는다. 손바닥 크기에 상상할 수 없는 정보와 지식이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치기문(不恥機問)이 몸에 뱄다.

우리는 북유럽 신화의 주신, 오딘(Audin)과 맞서고 있다. 한쪽 눈과 지혜를 바꾼 것도 모자라 '지혜의 샘물'의 신, 미미르(Mimir)의 머리를 잘라 가지고 다니며 지혜의 서핑(Surfing)을 즐겼던 오딘이 부럽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미미르보다 더 지혜로운 스마트폰 덕분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이 정말 지혜롭고 윤택해졌는가? '예'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당당히 '예'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정보와 지식이 풍부해 손쉽게 얻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을 상실하고 있다. 풍요 속의 빈곤을 억지로 감내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왜 일까? 많은 것들을 너무 쉽게 얻을 수 있는 데다 그 정보와 지식이 검증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길에서 듣고 바로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道聽而塗說 德之棄也).' '진위를 확인하거나 타당성을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대로 믿고 타인에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공자의 경고다. 반추동물, 소는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 똥으로 배설될 뿐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엄지 방아로 쉽게 얻는 정보나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 정보나 지식은 모래이고 평면이다. 유기적 연관성, 상호작용, 시행착오 등이 없는 정보와 지식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머리는 허구를 지식과 지혜로 승화시키는 가공 작업을 하지 못한다.

현대인은 내가 누구인지 알며 살아갈까? 온갖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다. 내 본질이 사라지고 타인의 본질이 나를 점령해 버렸다. 정보와 지식은 많지만 내 존재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지식이나 지혜는 부족하다. 외부에 무한히 산적한 정보와 지식은 자신에게 물음을 금한다. 이는 생각을 못하게 한다는 의미다. 사고가 사라진 삶에 이끌려가고 있다. 나는 잡동사니로 그득한 쓰레기통이다. 이런데도 있는 잡동사니도 모자라 부지불식 머리에 또 다른 잡동사니를 자꾸 채워 넣는다.

이것이 현대인의 슬픔이다. 지식이 충만한듯하지만 머리는 텅 비었다. 얻은 것 같지만 오히려 잃었다. 자신 존재마저 잃어 타인 존재가 자신을 지배, 조정한다. 공동체의 기능 인자에 지나지 않는 자원(資源)으로 전락하고 있다. 나를 대체할 존재가 무수하다. 상실의 시대를 맞았다. 인간 존재의 내포(內包)는 불확실해지고 외연(外延)만 확대되었다. 새로운 신이 등장했다. '제4차 산업혁명'이다, 우리는 이 신을 맹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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