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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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세상의 눈 김동우] 탁자(卓子). 물건을 올려놓기 위해 널조각과 그 널조각 아래 3~4개 다리를 붙여 만든 가구다. 대부분 널조각이 모서리 진 네모 형태다. 책상, 회의용 테이블, 식탁 등이 탁자에 해당한다. 네 곳에 모서리가 있으며 각 모서리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네모지고 반듯하다. 한자어로는 '方正'이다. 방정의 '方'은 사물의 면과 면이, 선과 선이 만나 꼭짓점을 이루는 '모'란 뜻이다. '방'의 상대자(相對字)가 '둥글다'라는 '원(圓)'이다. 이 둥근 탁자인 원탁(圓卓)과 비교하기 위해 네모진 탁자를 편의상 '방탁(方卓)'이라 하자.

대부분 방탁은 '꼭짓점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굽은 데가 없는 탁자'다. 다시 말해 방탁은 곧음, '직(直)'이 근간이다. 곧음은 '올바르고 공정하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直'은 유학 사상의 필수 개념이다. 공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直"이라 했고, 맹자는 "直이 아니면 道가 드러나지 않는다.' 했다. 성리학을 확립한 송나라 주희(朱熹) 역시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원리나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은 오직 直일 따름"이라 강조했다. '곧음, 직'은 사욕이 없는 깨끗한 마음과 행위인 셈이다. 때문에 탁자를 모서리 지게 만든 것일까? 네모진 탁자에서 공부하면 그릇됨을 바로잡아 올바른 성품이 길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까? 또한 네모진 탁자에서 회의를 하면 기발한 착상이 창출되길 바라서 일까?

어째 거나 책을 보거나 밥을 먹거나 의사소통을 할 때 어떤 형태의 탁자이든 상관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 의사소통할 때는 상황이 다르다. 탁자의 형태에 따라 의사소통의 정도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앉는 방탁이거나 여러 방탁을 이어 붙인 경우(간부회의. 중역회의 경우) 같은 줄 탁자에 앉은 사람과 마주 보기가 어렵다. 자리가 멀어질수록 마주 보고 대화는 불가능하다. 이런 배열 구조에선 토론이나 담론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없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얘기다. 방탁의 불합리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리의 위계서열이다. 상석과 말석 말이다. 어찌 보면 방석은 상명하복에 알맞은 모양새다.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면이 불가피하다. 방탁은 곧음의 상징이지만 자칫 융통성이 결여된 '경직'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방탁의 문제점을 말끔히 해결한 사람이 있다. 6C 브리튼 왕국의 전설을 엮은 <아더왕의 전설>의 주인공 아더 왕이다. 그가 침략자 색슨족을 쳐부술 때다. 그를 따르는 기사와 제후들이 어느 날, 식사 시간 때 자리 순서 때문에 다툼이 발생, 급기야 검을 뽑아 드는 싸움으로 이어져 결국 피를 부르고 말았다. 어찌하면 칼부림을 막을 수 있을까? 탁자를 원형으로 만들어 자리의 순서를 없애자. 굿 아이디어였다. 원탁이 제작되었다. 15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조립 이동식 대형 원탁이었다. 한 명이 차지하는 자리를 60cm로 계산하면 그 둘레가 90m가 넘고 지름이 30m에 이른다.

이 원탁의 각 자리는 주인이 따로 없었다. 아무 데나 앉으면 그 자리가 주인이었다. 상석과 말석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모든 자리가 동등했다. 자리다툼이 일지 않았다. 기사단은 밥 먹을 때, 대화할 때 모두 동료였다. 대화가 자연스러웠고 기탄없었다. 많은 무용담이나 사랑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탁에 둘러앉으면 하나의 커다란 동그라미가 된다. 기사단은 이 동그라미를 상부상조의 상징으로 여겼고, 그렇게 행동했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원탁은 착석자들이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형태다. 때문에 화자(話者)에 보다 집중해서 주목할 수 있다. 그만큼 전달력과 몰입도가 커져 회의나 대화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특히 서로 마주 볼 수 있으니 한 눈을 팔거나 딴전을 피울 수 없다. 의사소통이 효과적이다. 이런 원탁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고작 원탁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곤 비교적 전통 중국식당이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부 커피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주변 어디를 가나 '방탁'만이 즐비하다. 회의실이던 식당이던 도서관이던 집이던 말이다. 모난 탁자, 방탁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하지만 요즘 일부에서 '원탁회의'가 고개 들기 시작해 다행이다. 계급장 떼고 벌이는 끝장토론과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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