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눈]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기사와 직접 관련 없습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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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세상의눈 김동우] Libricide. 'library(도서관)'의 'libr'와 'homicide(살인)'의 'icide'의 합성어다. '책을 학살하다 혹은 파괴하다 '는 의미다. 책을 불에 태워버리거나, 물에 불려 타 용도로 사용하거나, 땅에 묻거나, 수장시키는 등 아예 책으로서 기능을 없애버린다는 뜻이다.

책은 장고(長考)의 정신적 고뇌와 수많은 경험, 사고의 혼을 담고 있다. 오랫동안 지식과 지혜가 숙성되고 농축된 진국이나 다름없는 것이 바로 책이다. 많은 책들이 세월이 갈수록 그 진가가 사그라지지 않은 채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인간의 발명품 가운데 으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책을 학살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책의 학살은 대규모로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도서관을 통째로 불 질러 책을 태워버리기도 하고, 개인 소유의 책을 샅샅이 빼앗아 폐기 처분한다. 책의 학살과정에 얻어 걸리면 책이건 그 소유자건 그 덧을 빠져나갈 수 없다. 왜 책을 학살하는 것일까? 책이 뭔 죄가 있다고?

조선시대 초기 책을 학살하는 법, '요서율(妖書律)'이 있었다. '요사스러운 책에 관한 법률'이라 할까? 태종부터 시행됐다. 이어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여러 조선의 왕들이 8도 관찰사에게 요사스러운 책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종의 '수거령(收去令)'이었다. 태종은 참위서(讖緯書: 미래의 길흉화복의 조짐이나 그에 대한 예언 또 그런 술수를 적은 책)와 음양서(陰陽書:천문, 역술 등이 예언서)를 압수해 불태웠다. 길흉화복의 예언을 적은 도참(圖讖과 비기(秘記)도 왕조의 유지를 위해 없애버렸다. 태종 때 참위서 등을 읽었거나 소유했던 전현직 벼슬아치 3명이 곤장 백대와 유배, 투옥 등의 처벌을 받았다.

세조는 명나라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었다. 명나라가 이씨 조선 건국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 국가 노선을 확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조선은 명나라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해야만 했다. 명나라에 잘 보이고 배신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세조는 우리 역사가 중국보다 앞선다고 기록한 역사책과 조선 이전의 우리 사상을 표현한 책들에 대한 수거령을 내렸다. <고조선 비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등 100여 종이 제거대상이 됐다.

성종 역시 요서율을 실행했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미혹하게 하여 속이거나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각종 참위서와 음양서 등 12종을 압수했다. 연산군도 폭정(暴政)을 비난하는 백성들이 늘자 언문(諺文)으로 된 책을 모두 없애게 했다. 언문을 익힌 백성들이 연산군의 폭정을 언문으로 격서(檄書)를 만들어 유포했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언문 사용금지법,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과 제서유의율(制書有違律)의 규율을 만들었다. 언문으로 구결(口訣)을 단 책은 모두 불살랐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일제강점기 책의 학살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일제는 정치체제를 비판하고 조선의 독립을 고취시키는 서적, 이단의 종교서적, 외설 음란 서적 등을 금서로 지정했다.<조선독립운동사>, <이완용매국비사>, <조선민요선>,<천주교성가> 등 수백여 종이 금서로 묶였다. 반공방첩(反共防諜)이 국가 슬로건이었던 박정희 정권에서도 금서 형태로 책의 학살이 이어졌다. 주로 민중사적 역사의식, 해방신학, 종속이론 등의 서적과 반정부 지식인들의 저술들이 금서에 포함되었다. 1980년대 이념서적에 대한 탄압 역시 책의 학살이다. 공산주의 사상과 관련된 서적 등 이념 서적에 대한 통제가 이어졌다. 불온서적 또는 빨간책이다. 이념서적이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86년 서점 등에 대한 대대적 압수 수색에 나서 233종의 이념서적을 폐기 처분했다.

책은 자료와 정보, 지식과 지혜를 담아 인간에게 삶의 방향성과 철학을 제시하기 때문에 목적 지향성을 가진 생물유기체다. 온갖 물건을 담아 주면 끝없이 새끼를 쳐 그 내용물이 줄어들지 않는 화수분과 같은 보물단지가 바로 책이다. 화수분의 파괴는 인간에게 양식을 빼앗는 절도범죄 행위다. 책은 함부로 처분할 수 있는 무생물이 아니다. 책은 어떤 위협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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