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유재풍 변호사

/ 클립아트코리아
/ 클립아트코리아

[중부매일 열린세상 유재풍] 일전에 친구들과 등산 도중, 거의 전문산악인인 친구가 "공룡능선 타봤어?" "지리산 종주 해봤어?"라는 대화를 동호인끼리 주고받으며 등산경력을 자랑하던 시절 얘기를 했다. 그 친구 말을 들으며 웃었다. 나도 다 해봤기 때문이다. 100대 명산 등반 시 지리산 종주를 했고, 올 6월에, 12시간 반에 걸쳐 22킬로미터에 이르는 공룡능선을 돌았다. 그 때의 지루함, 고단함, 무릎 통증 등을 어찌 잊을까. 그럼에도 시도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도전과 동시에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겉멋에서 발로(發露)한 것이었다.

겉멋으로 좋아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커피다. 30여 년 전 미국 유학 시절, 다니던 로스쿨 정문 앞에 세계 각국 커피를 파는 커피숍이 있었다. 그전까지 인스턴트커피 밖에 모르다가 미국인들의 아메리카노에 익숙해졌고, 위 커피숍에서 이것저것 맛보는 재미로 커피에 길들여졌다. 90년대 초, 이태리 출장길에서 만난 에스프레소 또한 한참 나를 붙들었다. 자연스레 관련 책도 많이 읽고, 3대 커피라는 블루마운틴, 마타리, 코나 커피에서 베트남의 저가 로부스타 까지 다양한 종류를 마신다. 새벽시간과 출근 직후는 담백한 아메리카노, 점심 식사 후에는 부드러운 카페라떼, 늦은 오후에는 달달한 캐러멜 마키아토. 가끔 직접 핸드드립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뭐가 어떻게 다른지 음미하지는 못하고, 그냥 겉멋으로 매일 몇 잔 씩 마신다.

클래식 음악듣기도 마찬가지다. 97년 법률사무소 개소 시부터 시작했다. 한수산 선생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책에서 감명받아 요절한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엘가 첼로협주곡' 시디를 구입해 들은 것을 시작으로,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 플롯, 클라리넷 등 개별악기에 이어 마침내 교향곡에 이르러 바흐로부터 시작해 현대의 펜데레츠키 까지 유명곡들은 거의 다 들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집, 사무실, 차에서 듣는다. 음악잡지도 구독하고, 국내외 유명 연주자나 교향악단의 연주가 있으면 시간 되는대로 찾고, 외국여행을 가면 그곳의 연주회 프로그램부터 찾는다. 그런데 음악 속에 묻혀 살면서도 그 깊은 맛은 잘 알지 못한다. 음악회에 늘 동행하는 아내는 미리 곡을 듣지 않고도 전문적 실제적인 평가를 하는데 반해, 나는 책과 인터넷에서 읽은 내용 밖에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겉멋으로 듣기 때문이다.

비슷한 취미를 갖고 있으면서도 대조적인 이가 같은 법인의 박종일 변호사다. 커피도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도 좋아한다. 둘 다 나보다 늦게 시작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깊이가 있다. 커피숍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주로 마시는데, 마실 때마다 커피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평을 한다. 쓴맛이 강하다든가, 신맛이 떨어진다든가, 구수한 맛이 더한다든가 하는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 모른다. 그냥 마신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친숙해진 기간도, 섭렵한 음반도, 읽은 참고도서도 내가 훨씬 길고 많다. 그런데 지적(知的) 차원에서 밖에 못 느끼는 나에 비해, 그는 감각으로 느끼고 즐긴다. 그뿐 아니다. 그의 삶에는 향기가 있다. 말수는 적지만 신중하다. 대화해 본 사람은 누구나 신뢰하게 된다. 때로 상담하다가 수임(受任)에 어려움을 느껴 그에게 부탁하면 차분히 설득해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유재풍 변호사
유재풍 변호사

고향에 돌아온 지 20여년,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이름도 알리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이 했다.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자는 생각에 여러 봉사단체에서 책임도 맡았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겉멋이었던 것 같다. 요즘도 거리에서 만나는 이들의 반 이상은 상대방이 먼저 나를 알아보는 편이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 중 후배들이 훨씬 많아진 지금,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이다. 늘 간구하는바, 내 이름, 목소리, 얼굴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는 에너자이저(energizer)가 되려면, 속사람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 삶의 향기가 있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사람, 속이 깊어 닮고 싶은 사람. 만산에 단풍이 물들어 가고,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시월 아침을 나서면서 내 속사람을 키워나갈 것을 다짐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