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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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급식센터로 향하다 힘없이 주저앉은 소녀의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았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아이의 뒤로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 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20분 정도를 기다렸지만,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작가는 그 어린 소녀를 급식센터로 안아다 주고 나무아래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울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참상을 알린 사진 '수단의 굶주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수상 두 달 후 양심의 가책때문에 자살했다. 아프리카 뿐 아니라 전쟁이나 폭력사태가 벌어진 험한 현장을 찾아가 위험한 순간을 사진에 담아냈지만 그 순간순간에 느낀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고자 했던 사진작가로서의 고단한 삶이 느껴진다. 사진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자 했고, 작가로서 명예로운 상까지 받았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린 20여 분 간 소녀를 위험한 상황에 그냥 두었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윤리와 직업적인 행위 사이에서 갈등한다. 케빈 카터의 사진은 이런 갈등의 중요한 사례로 곱힌다.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상황에서 선택한 하나의 가치는 다른 하나의 가치를 위배하게 된다. 사진을 통해 아프리카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었지만 소녀를 방치했다는 비난이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사진작가의 직업윤리보다 한 소녀의 생명이 더 존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런 비난은 옳은가. 훗날 케빈 카터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 속의 독수리와 아버지를 동일시했다. 그러나 내게는 아버지가 독수리의 공격 속에 속수무책으로 놓여있던 소녀였고, 독수리는 이 세계로 보였다"라고.

사회복지 현장의 윤리적 딜레마도 만만치 않다. 휴먼서비스로서 그 어떤 직업보다도 직업윤리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쓰레기가 쌓여있는 집에 가족들의 건강이 염려되는 상황이어도 법적으로는 대상자가 원하기 전까지 손을 쓸 수가 없다. 아동학대로 신고 될 수도 있다고 '고지' 같은 협박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움직이려는 대상자들을 볼 때도 갈등을 겪는다. 알코올 중독 상태에서 재활치료를 권유해도 술만 찾는 사람, 서비스를 받아 놓고도 안받았다고 우기는 사람 등 여러 유형의 힘든 사례들이 많다. 사회복지사가 옳다고 믿는 것들과 대상자 스스로 인지하는 것의 차이가 만들어낸 딜레마들이다.

좋은 인성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기술을 잘 갖춘 한 후배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상자들이 너무 의존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본인이 아닌가 자책한다고. 지속적으로 후원물품을 연계해주었는데도 또 요구해오는 이들을 감당하기 힘들 때 결국 우리가 그들을 의존하게 만들지 않았나 반성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본적 생활이 어려운 상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시 지원을 해주는 상황이 반복된다며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내게 묻는다. 무조건적 지원이 우리의 직업윤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방치하는 건 더 어긋나는 일이다.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최선을 다해 윤리적 실천을 해도 그 실천이 꼭 바라던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또한, 목표가 도덕적이고, 결과가 옳았다고 해서 모든 수단이 정당화 되어서도 안된다. 가만, 우리는 그동안 윤리적으로 옳다고 믿는 만큼 행동했는가. 실천 현장에서 혹은 삶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결정의 순간에 일단 결정을 하고 나서 그것을 옳다고 정당화 시켜온 것은 아닐까. 어느 상황에서는 내가 소녀일 수도, 내가 독수리일 수도 있겠다. 아니 그걸 지켜봐야하는 사진작가였을 수도 있다. 아, 바르게 사는 건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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