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본부장

세월. / 클립아트코리아
세월. / 클립아트코리아

개를 잔뜩 태운 무술(戊戌)년이 훤히 보이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제동장치가 더 이상 필요 없다. 적당히 달리다 고개를 넘지 못한 채 멈춰 선다. 그러면 끝이다. 개들은 내려 들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지고 돼지들이 새롭게 승차한다. 기해년이 출발한다. 며칠이 지나면 돼지들이 살판난다. 세월이 참 빠르다. 밧줄로 꽁꽁 매어 두고 싶다. 절대 불가능하다. 한탄스러울 뿐이다.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한 한스러움을 시로 노래한 학자가 있다. 고려 충선왕 때 역동(易東) 선생 우탁(禹倬)이다. 탄로가(嘆老歌)를 지었다.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게하고 싶구나. 귀 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를 다시 검은 머리가 되게 녹여 볼까 하노라."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 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은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눈을 녹인 바람으로 흰머리를 검게 하려 해도 아니 되고, 늙는 길을 가시 덩굴로도 막지 못하고, 백발은 몽둥이로 내리치려 해도 기어코 들이닥친다. 이것이 세월이다.

고려시대에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았던 터라 한시(漢詩)였다. 이 한시는 전해지지 않고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시만 전해진다. 조선시대 영조 때 김천택(金天澤)이 지은 <청구영언>과 정조 때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병와가곡집>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우탁은 충선왕이 아버지의 후궁, 숙청원비와 불륜을 저지르자 지부상소(持斧上疏)한 뒤 벼슬을 그만두었다. 우탁 본관(本貫)인 충북 단양에는 그의 석비(石碑)가 있다. 1995년(단기 4328년) 사인암 인근 청련암 주지 학산(鶴山) 스님이 한글로 탄로가(백발가)를 새겨놓았다.

탄로가는 무엇 하나 해놓은 것 없고 이젠 나이 들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지경을 표현한 시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세월을 늦춰 무엇 하나라도 하려는 안간힘이지만 모두 허사다. 그저 늙어감이 한스러울 뿐이다. 늙어가기 전에 무엇이라도 미리 해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 늙기 전에 잡았어야 할 좋은 기회를 다 놓쳐버린 셈이다.

'시불가실(時不可失)'이라 했다. '좋은 시기를 놓치지 마라.'는 뜻이다. <서경:書經 泰誓 上篇>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상(商) 나라 주(紂) 왕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으로 나라 기강이 흔들릴 때다. 상나라 제후국인 주(周) 문왕의 아들 발(發:추후 무왕)이 주왕을 치기 위해 군사들에게 한 훈시가 '시불가실'의 유래다. '(정벌에 나설) 때가 되었으니 이 좋은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 원문은 '시재불가실(時哉弗可失)'이다. 어조사 '哉'는 빠져도 의미에 문제가 없다. '弗'은 '不'과 의미가 같다. '시불가실'로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기회를 한번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으니 올 때 잡으라는 고사 성어다.

인간의 삶은 후회의 연속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별로 문제시하지 않고 습관화된다. 비교적 젊어서 후회하면 그래도 낫다. 경험이 될 수 있으니까. 백발이 머리를 차지할 때는 아니다.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늙어가는 것조차도 슬프다.

왜 세월을 한스러워하고 꼭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시간(時間)이 아닌 시각(時刻)을 챙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물리적, 객관적, 절대적 세월이다. 중단 없이 가는 분침과 초침을 연상하면 맞다. 시각은 시간이 멈춘 한 지점이다. 정신적, 주관적, 상대적이다. 시간이 양(量)이라며 시각은 질(質)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제우스의 아버지), 시각을 카이로스(Kairos:제우스의 막냇동생)라 했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시각, 카이로스는 잡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대상이다. 첫해 일출을 보려면 동해로 가 일출 시각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일출 기회를 잡은 셈이다. 시각은 기회다.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기도 하다. 삶은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바로 카이로스, 시각이다. 카이로스는 잡기 어렵게 생긴 신이다. 그래도 잡아야 덜 후회한다. 이 카이로스가 우리를 앞지르려 하고 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라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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