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처디자이너

새해 아침에 동네 앞산에 올랐다. 이름하여 구라산이다. 초정약수의 풍경과 광활한 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해 뜨는 진경산수를 가장 멋있게 볼 수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일몰의 아름다움도 훔칠 수 있으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즐기는 재미 삼삼하다.

매서운 북풍한설 속에서도 새 해 첫날의 일출을 보겠다며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다. 건강하게 해 달라고, 행복하게 해 달라고 저마다의 소망을 담았으리라. 슬프게도 그 자리에 내 어머니는 없다. 시루떡 한 말을 머리에 이고 험준한 이 곳에 올라 기도를 했던 순박한 어머니의 그 자리에는 메마른 잡초만 무성하고 찬바람이 기웃거린다.

성벽을 딛고 정상에 오르니 늙은 소나무나 애처롭다. 온 몸이 찢겨지고 부러졌어도 살아야한다며 이 추운 겨울날에 붉은 속살을 내밀고 있다. 구름사이로, 소나무 숲 사이로 태양이 솟아오르고 사람들은 외마디 탄성을 지른다. 아, 사람들은 이렇게 한 해를 기념하고 감동하며 꿈을 꾸는구나.

하산하는 길에 꽝꽝 언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보리와 마늘이 파릇하게 자라고 있었다. 불모의 땅에서 새 생명이 잉태하고 있으니 구시렁거리지 말자. 좀 더 정직하게, 좀 더 강인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살자. 새 해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자. 사랑을 하자. 이렇게 다짐을 하며 한 해를 시작했다.

초정에는 지금 세종대왕 행궁 조성이 한창이다. 세종대왕이 1444년 두 차례에 걸쳐 121일간 머무르며 당뇨병 등을 치료하고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이를 기념하고 관광자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세종대왕은 이곳에서 한글창제를 완성했으며 조세법을 개정했다. 그래서 조세학자들은 인근 청안을 '한국 조세사의 못자리'라고 말한다. 박연과 함께 우리의 악기 편경을 만들고 양로연을 베풀었으며 청주향교에 책을 하사하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다.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어짊을 실천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곳에서 펼친 것이다.

초정행궁은 이 같은 역사적 가치를 담기 위해서 조성되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초정과 주변의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한 '초정10경' 스토리북을 만들었다. 구라산성, 좌구산, 운보의 집, 저곡리, 비중리 석조여래입상, 홍양사와 삼세 충효문, 의병장 한봉수, 독립운동가 손병희, 과감한 현실론으로 나라를 살린 최명길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나랏말싸미'라는 작사를 통해 세종대왕의 초정약수 이야기를 노래로 즐길 수 있게 했다.

살아보니 학교 때 선생님과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교과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달달 외우던 것들은 세월이 지나 속절없이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교과서 밖의 숨가쁜 일들로 내 삶이 만들어졌다. 세종대왕 초정행궁의 이야기도 교과서 밖의 일이었지만 위대한 유산이다.

무엇보다도 문화적 시선과 체험과 성찰이 나를 앙가슴 뛰게 했다. 지역을 뛰어넘어 지구촌을 무대로 마음껏 희망할 수 있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문화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케 하고 더 큰 성장이 가능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문화지리는 내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가를 체계적으로 담은 학문이다. 그리고 문화경제는 이러한 가치를 중심으로 한 문화의 시대, 문화자본의 시대가 왔음을 웅변한다.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처디자이너

지금 문화지리와 문화경제가 화두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을 때 망설이면 안된다. 바로 문화의 숲, 예술의 바다로 가야한다. 개인과 지역 모두 문화적 사고와 예술적 활동이 삶에 젖고 물들며 스며야 한다.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중요하다. 나는 이 땅이 문화로 풍요롭고, 문화로 하나되며, 문화로 마음껏 희망하는 세상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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