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찾으려 일제 맞섰는데 이젠 통일해야지…"

[중부매일 김정미 기자] 애국지사 이일남(94) 옹의 생전 소원은 통일이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충남지역 1천241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이 지사는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웠고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이라며 "한 민족이 이제는 통일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3·1운동 100주년을 10일 앞둔 지난 19일 충남 금산군 금산읍 자택에서 만난 이일남 지사는 "많은 일들을 잊고 살았지만 항일운동을 했던 정신만큼은 그대로"라며 "광복을 염원했던 것처럼 이제는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주사범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일본인 교장은 걸핏하면 우리를 조선놈이라고 부르며 핍박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단체로 웅~ 소리를 내며 항의했다."

77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이 지사는 당시 상황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은 단체 행동을 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이후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은 전 방위적으로 이뤄졌다. 1925년생인 이일남 지사가 학생신분이던 1942년 6월에 항일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일본인 교장의 노골적 민족차별교육 때문이었다.

이 지사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비밀결사 단체인 우리회를 조직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며 항일활동을 했다.

1943년 12월에는 만주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만주행을 결행했다. 이일남 애국지사의 아내 서채영 여사(91)는 "젊은 시절, 남편은 전주사범학교 친구 두 명과 당시에는 큰돈이었던 70만원을 들고 만주를 다녀온 일을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동지들을 규합해 도착한 만주에서 이일남 지사는 독립군과 접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결국 1년만인 1944년 12월 만주 실정을 알리기 위해 귀국했다.

이 지사는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구루마(손수레)를 끌면서 겨우 끼니만 해결하다 돌아왔다"고 아쉬워했다.

막내아들인 이용완 수원과학대 교수가 "어린 시절, 만주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고 거들자, 청력이 좋지 않아 귀를 기울이던 이일남 지사는 "내가 가 봤어. 백두산!"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이일남 애국지사. 이 지사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소회를 묻자 주저 없이 통일을 언급했다.

"나라를 찾기 위해 우리 민족이 한 마음으로 일제에 맞섰다. 우리가 한 민족이니 이제는 하나가 돼야 한다."

이 지사는 만주에서 귀국 후 독립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금산사방관리소 인부로 취업했다가 1945년 1월 일본 헌병대에 발각돼 체포됐다.|

그해 8월 1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불경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돼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광복 후 출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나만 재판 기록이 남아 국가에서 대우를 받고 있으니 함께 고생했던 친구들의 자손을 보기가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세월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가뭇해졌지만 차마 내려놓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면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친구들에 얽힌 사연이다.

이일남 지사는 전주사범학교 친구 두명과 만주를 같이 갔는데 자신만 공훈을 인정받아 두고두고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했다.

헌병대에 잡혀 재판 기록이 남아 있던 이일남 지사와 달리 경찰에 체포됐던 친구들은 한국전쟁 당시 전주경찰서에 화재가 발생해 자료가 소실되면서 독립운동 근거를 찾을 수 없게 됐다.

똑같이 항일운동을 했는데 두 사람은 나라사랑 공로를 인정해줄 수 없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국가의 독립운동 공로 인정에 연연하지 않던 이일남 지사가 오랜 기간 사비를 들여가며 정성을 쏟은 것도 친구들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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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채영 여사는 "슬하에 6남매를 모두 대학 공부 시켰지만 국가유공자 혜택을 일부라도 받은 아이는 늦게 얻은 막내뿐이었다"며 "우리는 도움이라도 받았지, 남편과 함께 고생했던 친구들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해 자손들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딱하고 마음이 좋지 않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혼자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회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할 때도, 만주를 다녀올 때도 심지어 형무소 생활 중에도 선후배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죄를 만들기 위해 자행된 헌병대의 고문은 끔찍했다. 이일남 지사는 "두렵고 무서웠다. 시키는 대로 말하고 죄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막내아들인 이용완 수원과학대 교수는 "지금도 주무시다 신음소리를 내거나 비명을 지르신다"며 "아직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형무소에 7개월 동안 투옥됐을 때도 전주사범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이 지사는 "한 번은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교도관들이 감방 용변을 보는 구석에 쓰레기처럼 내던져 방치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서채영 여사는 "선배 어머니가 수감된 아들을 섬기려고 형무소에 일하는 사람으로 어렵게 들어왔는데 정성껏 준비해준 음식을 선배가 먹지 않고 이 사람에게 먹였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어머니 사연을 전할 때는 끝내 입을 떼지 못했다. 서채영 여사는 "시어머니께서 막내 시누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큰아들(이일남)을 수배했던 일본 헌병대에 고초를 당하고 그 충격으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귀띔했다.

눈가가 촉촉해지자 이일남 지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국가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전주사범학교 친구이자 항일운동 동지였던 두 사람의 나라사랑 공로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또박 또박 동지들의 이름을 되새겼다. "하나는 부여 출신 김학길! 하나는 전주 완산 출신 박완근!"

노환으로 기억력이 쇠퇴한 데다 청력까지 어두워졌지만 동지들의 이름만큼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애국지사와의 인터뷰는 1시간 여 동안 진행됐다. 아내 서채영 여사와 아들 이용완 교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기억을 내려놓았지만 한사코 붙들고 있었던 이름 김학길, 박완근. 이일남 지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도 우리의 역사였음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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