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벽초 홍명희 선생 주도 괴산장터 만세 시위
군민 600명 참여… 증평·음성·청주 등 들불처럼 퍼져

괴산장터 3.19만세운동을 기념하기위해 지난 1985년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수진교 부근에는 '만세운동유적비'가 세워졌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괴산군민인 김순자 할머니가(65)가 만세운동 유적비를 바라보고 있다./ 서인석
괴산장터 3.19만세운동을 기념하기위해 지난 1985년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수진교 부근에는 '만세운동유적비'가 세워졌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괴산군민인 김순자 할머니가(65)가 만세운동 유적비를 바라보고 있다./ 서인석

[중부매일 서인석 기자]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충북 괴산에서의 3.1절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충북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이 괴산군 괴산읍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괴산에서는 3월 19일 괴산읍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데 이는 충청북도 만세운동의 시발이기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출국치로 순국한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가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홍명희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했다가 손병희로부터 괴산의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부탁받고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규합, 1919년 3월 19일 장날인 괴산장터에서 괴산군민 600여명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탈출시키려 했으며 이 때문에 주모자 7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괴산의 만세시위는 다음 장날인 3월 24일에 홍명희의 동생인 홍성희의 주도하에 또 다시 불타 올랐으며, 29일 장날에도 저녁 6시경 1천500여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높였고 다수의 군중이 경찰과 충돌했다.

이튿날인 30일에도 계속돼 일제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순국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이어 4월 1일에는 다시 1천여명의 시위군중들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대한독립 만세"를 높이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는 등 괴산장터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충북지역의 만세운동의 계기가 됐다.

이처럼 '괴산장터 3.19만세운동'은 충북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했던 곳으로 이후 증평, 음성, 청주, 제천 등으로 불길처럼 번지면서 충북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충북의 독립만세운동의 계기가 된 홍명희의 생가 근처이자 그 옛날 장터였던 괴산읍 서부리 수진교 부근에는 지난 1985년 '만세운동유적비'가 세워졌다. 처음 '만세운동유적비'에는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홍명희 이름이 빠졌으나 이데올로기 그림자가 거둬진 1998년에 다시 건립된 '만세운동유적비'에는 홍명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근수 괴산향토사연구회 회장은 "괴산장터 3.19만세운동은 충북최초의 만세운동이며 벽초 홍명희 선생이 주도한 운동"이라고 강조한후 "벽초 홍명희 선생이나 아버지인 홍범식 군수(충남 금산)의 경우 항일 저항정신이 높으셨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들의 저항정신을 우리는 계속해서 본받아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차영 괴산군수는 "괴산장터 3.19만세운동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괴산군민 모두의 소통과 화합을 바탕으로 지속발전하는 괴산의 미래를 힘껏 열어 가겠다"며 "100년 전 그날의 함성과 기억을 재현, 괴산만세운동의 역사와 의의를 재조명하고, 지난 100년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괴산군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괴산읍 홍범식 고택 일원에서 대규모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괴산군과 괴산문화원은 '괴산장터 3.19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3월 19일 오후 2시 홍범식고택 주변, 옛 3.19만세운동 길, 괴산문화예술회관 등에서 유공자가족, 유관기관·단체, 주민, 학생 등 2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괴산만세운동 100주년 학술토론회 ▶3.19만세운동 기념식 ▶만세운동 재현행사(시가행진) ▶부대(체험)행사 등을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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